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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지바람 Nov 15. 2024

페페와 청소'녀'

인터넷을 조금이라도 돌아다니면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개구리. ‘페페’는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밈(meme)이 되었다. 슬플 때도 등장하고 기쁠 때도 등장하는 개구리 페페는 그 친숙한 이미지와 응용하기 좋다는 이유로 온갖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심지어 우리가 최악인 시간을 보낼 때도 페페는 야무지게 우리를 비웃으며 등장한다. 페페는 200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던 만화가 맷 퓨리가 처음으로 만들었다. 


별 생각 없이 그가 만들었던 페페는 제작자와 그 친구들만 사용하는 밈이었다. 제작자인 그도 페페를 전 지구적인 인기를 누릴 캐릭터로 노리고 디자인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할, 자신을 대신할 페르소나로 시작한 페페는 어느 순간 거대한 쓰나미를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게 된 것이다. 흔히 어떤 이유에서 인지 모르지만 ‘알고리즘의 수혜’를 입은 콘텐츠들이 있다. 인기가 있다고 생각되면 SNS에 번지고, 사람들은 인기 콘텐츠를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그렇게 페페는 전세계의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비극은 페페가 스타가 되고나서 시작되었다. 악명 높은 커뮤니티인 4chan 유저들이 페페를 악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차별주의자의 밈으로, 인종차별 주의자의 이미지를 덧씌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 밈은 점점 불붙었고 페페는 어느 순간 다양성의 반대항이자 차별주의자의 아이콘이 된 것이다. 특히 트럼프의 노란 머리를 단 페페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트럼프주의자들의 아이콘으로 급격한 인기를 끌게 되었다. 차별주의자, 패드립을 갈기는 유쾌한 개구리, 그리고 트럼프 주의자. 페페의 이미지는 급속도로 추락했다. 


자신이 사랑하던 캐릭터인 페페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입게 되면서 제작자 맷은 절망했다. 처음에는 페페를 구명하려고 했지만 조직적인 악의를 이기긴 쉽지 않았다. 결국 그가 사랑하는 이들과 친구들도 페페를 멀리했고, 우울증에 빠진 작가는 실의에 빠져 페페를 죽이는 일을 감행했다. 제작자의 노력은 소용없었다. 제작자의 의도에서 벗어난 페페는 영원한 생명력을 얻었고, 폭주한 페페는 온갖 곳의 밈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많은 이들의 구명운동과 정화활동으로 페페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존재로 다시 급부상했지만, 페페의 타락은 제작자도 컨트롤 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밈이라는 특성이 그렇지만 변질되면 그 본래 의미와 의도도 잊혀진다. 안 좋은 일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른 스타가 다시 부활하려고 해도, 그 부정적 이미지를 벗어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유명한 것으로 유명한’ 카다시안 패밀리처럼, 영리하게 그것을 사업으로 전환하거나 쇼 비즈니스로 잘 끌어들이면 상관없겠지만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극히 드문 케이스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후기 저서인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에서 언어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다. 세계를 반영하는 도구로서 언어를 바라봤던 초기 관점과 다르게, 그는 후기 철학에서 언어는 더 이상 세계를 그려내지 못한다고 바라봤다. 언어 게임(language games)으로 언어와 세계에 대한 관점을 전환한 그는, 우리가 말하는 언어와 세계는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바라봤다. 제작자 맷에게는 페페가 사랑스러운 ‘나’이자 가족이었지만, 트럼프 지지자들에게는 ‘위대한 트럼프’를 상징한 것처럼 하나의 상징에 대한 해석은 나뉘어진다. 


그렇기에 한번 씌워진 혐의를 벗기려면 많은 이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이미지를 덧입히려면 알고리즘의 수혜를 한 번 더 받는 걸로는 모자라다. 기존 관념을 완전히 덮어버리는, 적어도 2배나 3배 이상의 강력한 이미지가 필요하다. 한 번 사고에 박힌 밈(meme)은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어떤 계기를 통해 다시 밈이 부각되면 예전 이미지까지 다시 불러온다. 밈의 수명은 네트워크의 힘 덕분에 영생에 가깝다.


밈과 마찬가지로 언어도 마찬가지다. 어떤 언어는 한 번 뇌리에 박히면 다시 고쳐지지 않는다. 한 번 오염된 언어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괴롭힌다. 일베로 인해 오염된 ‘-노’와 ‘-누’의 어미, 중력과 부엉이바위라는 이미지는 끊임없이 소환된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말처럼, 비슷한 이미지나 언어가 발화되는 순간 사람들은 오염된 밈을 떠오른다.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다시 검토할 만큼, 그 힘은 매우 강력하다. 


이 전략을 영리하게 잘 계승한 곳은 아이러니 하게도 페미니즘 진영이다. 일베의 전략을 차용한 이들은 ‘남혐’을 위해 온갖 영역에 자신의 사상을 퍼뜨리고 있다. ‘청소녀’라는 개념은 이를 잘 드러내는 단어라 할 수 있다. 다행히 많은 자정 작용 덕분에 묻힌 단어지만 이 단어가 탄생한 배경을 들으면 기가 차지 않을 수 없다. ‘청소년’이라는 단어가 남성의 언어이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청소녀’라는 단어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청소년이라는 단어는 남성+여성을 포괄하는 단어다. 누구 한 쪽을 편들기 위한 성차별적인 단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화’라는 명목 하에 청소년을 검열한 것이다. 


다행히 많은 곳에 사용되지 않고 여성 단체에서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청소녀를 사용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는 진보 사회 단체나 기관에서 종종 인용되거나 사용된다. 2021년 기사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는 것을 보면, 오염된 언어가 보이는 생명력을 실감할 수 있다. 장애인대신 사용하자는 ‘장애우’라는 단어도 장애인들이 앞장서서 쓰지 말자고 주장했지만 오랜 기간 매체에 남아 장애인들을 괴롭힌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최근 있었던 폐경/완경 이슈도 마찬가지다. 대한폐경학회가 ‘완경’ 단어는 학술 용어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며 폐경을 쓸 것을 권했지만 여성 단체는 ‘폐’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어감 때문에 이를 ‘완’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모차/유아차 논쟁도 비슷한 결에서 논란이다. 유모차-유아차 모두 표준어로 사용 되도 상관없지만, 하나씩 언어를 자신들의 언어로 교체하는 페미니즘 진영의 집요함은 징그럽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조금씩 이런 식으로 언어를 그들의 언어로 교체하는 순간, 많은 부분들이 왜곡될 것이다. 


심지어 최근 출판계에서는 성차별 용어를 사용한 문장을 고치겠다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기존 출간물을 고치면서 잘못된 것을 수정하겠다는 이 주장은 놀랍게도 출판계 편집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미 여성 작가들 가운데 어떤 작가는 스스로 출판물을 절판해 문장을 고치고 재발간하는 만행까지 저지르고 있다. ‘페미니즘 검열’이 알게 모르게 자행되는 것이다. 혹자는 ‘차별 용어를 고치는 것이 어때서’라고 얘기할 수 있다. 잘못된 것을 고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문제를 걷잡을 수 없게 만든다.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에서 자신의 성애 대상인 어린 여자 아이를 묘사하는 부분이 ‘역겹다’거나 ‘성차별적 용어’라고 해서 문장을 다 고친다고 가정해보면 어떨까? 기존 문장이 가진 아름다움과 표현들을 고치는 순간 그 책이 원래 충격을 주었던 원문이 훼손되는 것이다. 7080시대 한국 남성작가들이 썼던 여성 차별적인 표현을 ‘시대에 맞지 않다’고 수정하면, 원래 작가 의도를 벗어난 문장들로 이를 대체하게 된다. 생존 작가라면 이에 저항할 수 있지만 사망한 작가일 경우 편집부의 만행에 저항조차 못한다. ‘기분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위대한 유산이 사라지는 것이다. 


소설만 아니라 역사에도 이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여성 차별적 용어, 혹은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불쾌’하다는 이유로 제대로 기록되지 않거나 혹은 이 부분을 부당하게 강조하면 어떻게 되는가? 일본의 역사왜곡과 동일한 왜곡이 벌어지는 것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이러한 행동은 과거 홍위병들이 중국 문학과 역사에 저지른 일과 동일하다. 사상의 이름으로, ‘여자’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만행은 ‘연대’와 ‘협력’이라는 허울좋은 명분으로 자행되고 있다. 심지어 이에 감화된 남자 작가도 스스로 검열하는 지경까지 이르면 할 말이 없어진다.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이 모든 일이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상의 ‘정당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이 큰 문제다. 이에 대해 지적하거나 반대하면 ‘공부하라’는 말과 함께 몽둥이를 휘두르는 페미니즘 전사들은 무소불위로 그들의 힘을 휘두르고 있다. 뒤늦게 이를 고치고 다시 원래 언어로 복원하려면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 페페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데는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갔다.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남아 있고 돌이킬 기회가 있으니, 언어를 장악하려는 페미니즘을 향해 올바른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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