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금주의와 대한민국
소수의 인원만 사용하는 스레드(Threads)는 허세와 자만심으로 넘치는 이들이 이용하는 어플로 유명하다. 그런 만큼 거짓과 진실, 그 중간 어디에 있는 이야기들이 유통된다. 심각하게 진실을 의심해 볼만한 이야기도 있는 반면, 문득 튀어나오는 진실에 가까운 업계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는 차원에서 재미있는 장소다. 어김없이 큰 생각을 하지 않고 스크롤을 내리던 와중 내 눈길을 끄는 글이 있었다. ‘토스’에 대한 글이었다.
토스에서 일을 한 김유리라는 분이 토스 문화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었다. 육각형 인재보다 한 가지 아주 뾰족한 장점을 가진 사람이 토스에 채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하면서 그녀는 토스가 강점을 가진 이들을 조립해 하나의 조직을 구성(Silo) 한다고 말했다. 토스에서는 ‘사일로’라 할 수 있는 형태로 분리, 결합했을 때 최상의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조직으로 재구성을 한다는 이야기였다.
여기까지는 익히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토양어선’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토스의 업무환경은 극악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업무 강도는 물론이고 주변 평가를 끊임없이 의식해야 하는 악독한 ‘원 팀 컬쳐’는 유명하다. 괴롭힘으로 인해 꾸준히 신고가 들어가는 것은 물론, 사내정치로 인해 상처만 입고 회사를 나간 이들의 증언이 매일같이 갱신되는 곳. 그러나 내가 눈길을 준 부분은 토스 직원들이 정신과를 다닌다는 부분이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토스 건물 맞은편에 있는 정신과는 밀려오는 환자 때문에 누가 토스에서 왔는지 병원 의사가 알 정도라고 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남부러운 직장이고 스스로의 ‘자부심’이라 할 수 있는 직장이지만 그 직장에 다니는 이들은 좀먹고 있는 것이다. 계속된 업무 부하와 퇴근 없이 ‘재전’(재택전환)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회사에서 토스 직원들은 갈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 돈을 많이 주니까, 빠르게 성장할 수 있으니까, 토스 커뮤니케이션 팀과 커뮤니티 관리자들은 토스를 계속해서 좋은 이미지로 포장을 한다. ‘일은 힘들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대신 그거에 합당한 대우를 한다는 것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렇기에 토양어선에 탄 사람은 토스의 문화를 알고 들어간 것이기에, 자신의 괴로움을 외부에 토로할 수 없다. 스스로 계약해서 들어간 거 아니야? 누가 거기 들어 가래? 시쳇말로 ‘누칼협’의 원리가 작동되는 것이다. 말을 할 수 없는 이들은 자신의 약점을 동료에게 털어 놓을 수 없다. 동료에게 타인의 약점은 회사 내에서 올라갈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경쟁과 성과를 강조하는 토스의 문화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동료의 감시와 ‘평가’에 민감한 이들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토린이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커뮤니티를 뜨겁게 돌았던 토스 신입의 이야기는 이를 보여준다. 자칫 밉보이거나 업무를 ‘게을리한다’고 생각이 되면 따가운 질책과 ‘교정’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동료에게 잘 못 보이면 어렵게 들어간 회사를 나갈 수밖에 없기에 괴로움에 처한 이들은 새벽이 넘는 시간까지도 계속 일을 해야 한다. 새벽 2시의 미팅에도 수락 버튼을 눌러야 하고, 새벽시간에도 채팅방의 태그 메시지에 답변을 해야 하는 신입의 괴로움은 상상 이상의 고통이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이들 문화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다. 앞서 ‘누칼협’의 원리를 이야기했듯이 고연봉을 약속하는 토스의 문화는 ‘돈 값은 해야지’라는 논리로 연결된다. 그렇게나 많은 돈을 받는다면 당연히 그렇게 일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너 없어도 거기 들어가고 싶어하는 이들 많아, 그만큼 일을 해야지. 커뮤니티에서 본 댓글은 사용자의 논리로 토스 직원을 날카롭게 정조준한다. 많은 연봉은 거저 받을 수 없다는 논리로 노동자를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노동은 정당화된다. 결국은 돈인 것이다. 많은 돈을 담보하면 그 정도 고통은 가능하다.
흔히 이야기하는 ‘군대 N년 다시 갈래? 아니면 1억 받을래?’의 질문과도 비슷하다. 돈이면 뭐든 가능하다는 배금주의의 세상에서 토스 노동자는 소외된다. 고통스러운 환경에 대한 개선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개선의 노력보다는 서바이벌의 환경에서 생존할 것을 요구 받는다.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좋은 학교를 갈 수 있다. 좋은 학교를 나와야 좋은 직장을 간다. 트랙에서 탈락되는 것은 죽음과도 같은 이야기가 된다. 돈은 사람을 유순하게 만든다. 어떤 환경에서도 ‘돈’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된다. ‘돈을 받으니까 일을 한다’는 단순한 명제의 뒤를 살펴보면 전혀 단순하지 않은 진실이 담겨 있다.
오징어게임 2에서 참가자들이 죽음의 환경에 몰려도 ‘한 판 더!’를 외치는 것과 비슷하다. 목숨을 담보한 불합리한 게임에서 생존자들은 피의 역사를 잊고 돈을 바라본다. 돼지저금통 속에 있는 찬란한 돈. 사람들은 돈을 바라보며 매혹된다. 성기훈이 참가자들을 설득해 게임을 중단하고 나가려고 열심히 이야기하지만 이 논리는 통용되지 않는다. ‘이 정도 받고 나가라고?’ 참가자들은 목숨을 걸고 플레이 한 게임에서 한 명의 몫이 적다는 이유로 게임을 더 진행하려고 한다. 더 많은 돈은 진리이자 동시에 단 하나의 정의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돈은 ‘신’이다.
한 사람 당 3억이 넘는 돈이 배정되어도 사람들은 그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만약 내가 한 판 더 이겨서 456억 원의 주인공이 된다면? 까짓 거 한 번 더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피와 공포에 빠진 사람들은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다. 게임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탈락한 사람은 그저 ‘운이 나쁜’ 사람일 뿐이다. 만약 게임을 하지 않았다면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들을 잊는다. 돈이 주어진다면 불합리한 상황도 감내할 수 있다는 이들은 끊임없이 게임-사회에 농락당한다.
성기훈이 이야기하는 ‘시스템의 전복’은 그렇기에 힘을 잃고 이상하게 비춰진다. O와 X의 갈래길에서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스페셜 게임’에 성기훈은 눈을 감는다. 어쩔 수 없는 희생을 감내하고 주최 측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드라마에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는 지점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서로가 죽고 죽이는 이 ‘게임’ 안에서 갑자기 주최 쪽을 향해 총질을 하는지 말이다. 게임의 법칙을 따르면 돈도 벌 수 있고 안전하게 나갈 수 있는데 왜 이들을 향해 총을 쏴야 하는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성기훈이 프론트맨에게 패배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시스템은 너무나 공고하다. 피보다 돈이 우선시되는 냉철한 손익 계산 앞에서 시스템을 타파하자고 주장하는 성기훈은 영웅이 될 수 없다. 프론트맨의 냉소는 사실상 그를 바라보는 관객의 냉소와 동일하다. 누군지 특정할 수 없는 검은 마스크는 관객을 대신해 성기훈을 처벌한다. 시스템에 따라라.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 드라마 안에서나 밖에서나 성기훈은 지지를 받을 수 없다. 배금주의라는 강고한 돈의 논리는 그렇기에 메타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을 옥죈다.
경제 유튜버 슈카는 콘텐츠를 통해 종교가 사라지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조명한 바 있다. 무종교인 비율이 2023년 기준 63%에 이른다. 20대 일수록 더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말한 그는 ‘사랑’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더욱 더 가혹해지는 형량과 잔혹해지는 사람들의 양식을 바라보며 종교의 가치 회복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에 건넨다. 그러나 사실 한국인들은 무종교로 변한 게 아니다. 물신(物神)이 상위에 존재한다. 배금주의를 교리로 삼아 돈은 옳다는 믿음은 지금도 늘어나고 있다.
배금주의를 동력으로 사회의 가치는 쉽게 훼손되고 사람들은 소외 당한다. 그런 현실에서 무시 받지 않으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하나의 가치, 숫자로 모든 것을 계량하는 사회에서 돈은 사람 그 자체로 묘사된다. 456억을 가진 성기훈과 그렇지 않은 성기훈이 은행에서 다른 대접을 받는 시즌1의 장면을 떠올려보자. 456억이 없는 성기훈은 은행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거나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하지만, 456억을 통장에 가진 성기훈은 VIP룸에서 대접을 받는다. 심지어 은행장에게 1만 원을 빌려달라는 이해할 수 없는 요구에도 은행장은 1만 원을 빌려준다. ‘456억 원’은 불합리한 일도 가능하게 만든다. 권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배금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가? 방법은 결국 시스템을 벗어나는 것이다. 시즌2에서 성기훈이 하려고 한 그 일. 그러나 결과적으로 실패한 그 일은 감독이 찾은 해답이다. 토스에서 심한 괴로움을 겪고 퇴사한 김유리 씨는 결국 멘탈 헬스케어 회사에서 자신의 삶을 되찾는다. 시스템 밖에서 시스템에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이들을 구원하고 있는 것이다. 배금주의에 사로잡히지 말 것. 결연하게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