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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페이’와 ‘레이베이’의 차이

by 명지바람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무언가 트렌디하거나 귀에 꽂히는 음악이 대중적이지 않길 바라는마음이 한 켠에 있다. 소위 말하는 ‘힙스터’ 본능을 가지고 있어서 어렸을 적에는 꽤나 이 성질을 버리기 어려웠다. 남들 다 듣는 브릿팝을 ‘유치하다’고 듣지 않다가 나중에 빠져서 한창 듣는 것은 물론이고, 대학 때는 인디에 푹 빠져서 남들 다 아이돌 음악에 빠져서 춤추는 동안 딥한 한국 인디만 들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참 답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때는 그게 멋이라고 생각했고 ‘남들과 다른 나’라는 정체성이 멋있다고 생각했던 시절이기에 그 시절을 떠오르면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제는 힙한 감성에서 많이 빠져나왔다. 음악만이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 마이너를 추구했던 나였지만 단 하나, 음악만큼은 마이너한 감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예전에는 좁고 깊게 음악을 팠다면, 이제는 다른 영역도 감싸 안을 만큼 많이 유해졌지만 여전히 좁은 구멍이 존재하는, 그런 음악 취향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이런 나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아티스트, 라우페이(Laufey)가 나를 뜨겁게 만들었다. 한동안 푹 빠져서 그녀의 노래를 듣는 게 습관이 될 정도로, 재지(Jazzy)하면서 달콤한 음색은 상당히 중독적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라우페이 음악을 들어보라고 권할 정도로 푹 빠져 있었고, 음원 만드는 모임에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라우페이를 꼭 들어보라고 얘기할 정도였다. 플레이리스트를 반복 재생할 정도로 좋아하던 나는 어느 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라우페이’는 틀린 표현이었다. 아이슬란드 출신 아티스트였기에 영어 읽듯이 그녀 이름을 읽어서는 안 됐던 것이었다. 실제 한국어로 그녀의 이름을 표현하자면 ‘레이베이’, 레이베이(Laufey)가 올바른 표기법이었던 것이다.


음악 관련 기사를 읽다가 발견한 이 사실에 나는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이제까지 잘못된 이름을 주변에 얘기하고 다녔다니! 한 껏 달아오른 수치심에 얼굴을 제대로 들 수 없을 정도였다. 화끈거리는 뺨을 주체하기 힘들어 화장실에서 연거푸 세수를 할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요 근래 겪어보지 못했던 수치스러운 일이었기에 망연자실했다. 내 잘못을 주변에 고백하고 ‘사실은 이렇습니다’라고 해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 오히려 미친 사람의 흰소리라 생각할 것이 뻔했기에 나는 포기했다.


어릴 적 나는 용어에 대단히 민감했다. 제대로 발음을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그게 현대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교양이라고 생각했기에 종종 발음을 고쳐 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묘한 고양감과 우월의식에 빠지곤 했다. 사실 발음과 용어를 지적하는 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학문적인 영역이 아닌 일상적인 상황에서, 용어의 적확성을 따지는 것은 어찌 보면 무례한 행위일 수 있다. 가르쳐주는 사람은 선의라는 명목 하에 지적하는 것이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게 가르치려는 행위로 간주되기에 기분 나쁠 가능성이 높다.


보통은 무시하거나 알아도 모른 척 넘어가는 것이 에티켓이겠지만 그렇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뒤에서 조용히 알려주거나, 앞에서 지적하는 행위를 반복했기에 내가 저지른 실수가 더 크게 다가왔었다. 결국 이렇게 망신을 당하는구나,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 수치는 내가 나 스스로에게 부과한 것이었다. 주변에서 아무도 내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혼자서 착각했고, 혼자서 수치심을 느낀 것일 뿐. 세상의 큰 흐름에서 보면 개미가 코끼리 발 꼬집는 일에 불과한 자잘한 실수다.


결국 내 자신을 혹독하게 채찍하고 근엄하게 규제하려고 했던 것은 나였다. 도덕적 우월감과 지적 허영심을 자랑하면서 인정욕을 채우려고 했던 것도 결국 나. 모든 것은 사실 나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그동안 ‘나를 감싸 안아야 한다.’ ‘나를 돌봐야 한다’는 책을 열심히 읽어 놓고 사실상 그 내용을 전혀 실천에 옮기지 않았던 것이었다. 열심히 허위의식으로 나를 포장하고, 알량한 우위로 나를 높이려고 했던 것이었다.


올해도 글러먹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 순간이었다. 라우페이와 레이베이의 차이는 내 자신의 허영심과 도덕적 우월감의 차이였다. 진짜 부끄러워야 할 순간은 사실 레이베이라는 본래 이름을 알게 된 때가 아니다. 이 차이를 전혀 모르고 살았던 그 시간, 순간의 부끄러움에 몸을 비틀었던 시간 그 이후의 ‘순간’이 진정 뉘우쳐야 하는 시간이었다.


최근 모임에서 추천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그 때도 자신 있게 ‘레이베이’를 소개했었다. 레이베이를 반복하는 상황에서도 나는 여러 차례 ‘라우페이’로 부르려고 했던 자신을 발견했다. 입에 한 번 붙은 라우페이는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레이베이로 고쳐 부르긴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라우페이건 레이베이건 사실 그게 진짜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 레이베이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내 이름이 어떻게 불려도 상관없다’고 말한 바 있다. 언젠가는 레이베이가 자연스러워지겠지, 나는 의식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다시 되뇌었다.


**레이베이(Laufey) <From The Start>

Laufey - From The Start (Official Music 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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