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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키오스크

한국 교회는 어디로 향하는가?

by 명지바람

“역시 교회가 그렇지, 돈만 밝히네”


날 선 반응에 나는 물음표를 남겼다. 단체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최근 종교계에서 불고 있는 현대화 과정을 취재한 기사가 인상적이라, 그 기사를 방에 공유했더니 날아온 반응이었다. 기사는 기독교가 최근 헌금과 십일조를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는 키오스크를 설치했다는 내용이었다. 불교도 키오스크 보시함을 설치하면서 보시를 좀 더 쉽게 하고자 고민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고, 가톨릭 역시 기부를 하는데 있어 편리한 방식인 키오스크를 고민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종교도 바뀌고 있다는 기사였다.


그러나 지인은 기독교를 꼬집으며, 기독교가 너무 돈을 밝힌다고 말했다. 지인은 종교가 너무 속물적으로 변했다고 지적했다. 헌금을 보다 ‘편리한 방식’으로 받겠다는 것은, 돈을 내라는 은근한 강요라고 주장했다. 교회는 보통 헌금을 예배를 다 끝마치고, 헌금통을 돌려 헌금을 받는 방식을 사용한다. 유년부에서 성인부에 이르기까지 이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 다만 너무 노골적으로 현금을 받을 수 없으니 봉투에다가 넣어서 헌금을 받는 방식이다. 누가 얼마를 냈다더라, 같은 소문은 빠르게 퍼질 수 있으니 누가 얼마를 냈는지 모르게 헌금봉투를 통해 내는 간접적인 방식을 채택했고, 수십년이나 지속된 방법이다.


다만 이와 같은 방식이 요즘에는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현금을 쓰지 않고 카드 결제나 ‘XX페이’를 통해 지불하는 것이 일상적인 사회다. 따라서 현금을 들고 다니는 것은 특별한 경조사가 아닌 이상에 잘 들고 다니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카카오페이나 토스 등 가벼이 이용할 수 있는 플랫폼도 많이 등장한 상황에서 현금으로 결제하는 게 낯선 세상이 된 것이다. 어떤 업체는 아예 현금을 받지 않는 곳도 있으니 시대의 흐름으로 보면 교회의 방식은 대단히 고루한 방식일 것이다.


그렇기에 교회 내부에서도 이를 바꾸자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로 인해 등장한 것이 ATM기였다. 맞다. 현금을 버리지 못하고 ‘현금을 찾는 과정’을 보다 효율적으로 바꾼 것이다. 저 멀리 편의점 ATM기나 은행 ATM를 통해 바꾸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의 ATM를 활용해 현금을 뽑아 헌금하라는 교회의 배려. 비난한 지인은 ATM기조차 불편하다고 이야기한 사람이다. 노골적으로 헌금을 내라는 요구로 비쳐 지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비난이다.


그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돈이 개입되는 것이 불쾌하다는 것이었다. 효율화라고 표현하는 것은 너무 온건한 주장이라는 그의 말에 나는 말을 잃었다. 현금통으로 돈을 걷는 것은 괜찮고 키오스크는 나쁘게 생각하느냐는 나의 반문에 지인은 그게 맞다고 말했다. 지인은 오래전 기독교를 신실하게 믿던 신자였다. 지금은 그는 기독교를 멀리한다. 사연은 모르지만 기독교의 민낯을 보고 실망했기에, 지금은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였다.


“보다 빠르고 신속하게” 지인은 교회가 자본주의에 무릎 꿇었다고 표현했다. 자본은 종교라고 예외가 아니라는 그의 주장. 사실 맞는 말이다. 헌금통으로 헌금을 걷던 방식은 어찌 보면 비효율적이다. 가령 헌금통에 헌금을 넣지 않고 빈 봉투를 넣는 경우는 어떠한가? 교회 입장에서는 이를 검증할 수 없다. 물론 헌금봉투에 펀칭을 뚫어 돈이 들어 있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방법을 사용하긴 하지만, 이는 돈 계산을 빨리 하기 위한 방법일 뿐, 누가 돈을 냈는지 안 냈는지 판별하기 위한 수단은 아니다.


헌금통을 돌리고 이를 수거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다시 정확한 숫자로 변환하는데는 사람의 인력이 필요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비효율적인 방식이다. 효율적인 수거 방식이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제1원칙 : 시간은 돈이다. 그리고 빠르게 돈을 받으면 오히려 돈을 버는 것과 다름없다. 자세히 따지고 보면 교회가 자본주의 논리에 복속한 것이나 다름없긴 하다.


문제는 ‘교회’라는 조직이 봉사로만 굴러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교회도 엄연히 운영할 자금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 대한민국 법 체계를 준수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자본주의가 시대정신인 상황에서 교회도 이를 따를 수밖에 없다. 봉사자들, 기부를 위해 운영하는 인력들, 그리고 전도사와 목사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이동’ 한 번은 돈이 필요하다. 그것을 도외시할 수 없다. 기부도 돈이 있어야 가능하고 조직도 돈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 교회가 돈을 밝히면 안 된다는 그의 일갈은 사실 아무런 힘이 없는 이야기다.


거창하게 확장된 이야기가 되었지만 문제를 단순하게 바라보면, 그의 주장의 정당성과 상관없이 현실은 냉혹하다는 점이다. 조직을 지원할 돈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헌금과 봉사에서 나온다. 중세시대 때의 청빈과 검소는 중세시대에서나 통용되는 원칙이다. 공기처럼 퍼져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피와 마찬가지다. 피는 돌아야 가치를 얻는다. 피가 없으면 사람은 죽는 것처럼, 교회 조직도 필연적으로 돈이 필요하다.


무책임한 주장과 논리다. 원래라면 사실 이 이야기를 길게 끌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런 주장에 동조되는 분들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교회는 돈을 밝혀서는 안 된다. 맞다. 예수께서도 청빈과 검소, 그리고 성전을 저잣거리로 만드는 상업 활동에 대해 비판을 가한 바 있다. 그러나 키오스크 설치는 돈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기초 활동을 보다 편리하게 바꾸는 수준의 행동일 뿐, 탐욕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안타깝게도 교회가 저지른 패악이 깊다 보니, 교회가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 비난하는 이들이 많아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늘었다.


기독교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넘쳐나는 사회다. 침소봉대가 일상화되고 사소한 행동 하나가 비난 거리가 되는 이 사회에서 교회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부분이다. 아니라고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교회는 점점 자생력을 잃고 있다. 폐쇄적인 사회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본령을 바로 세우고 오해를 척결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21세기 안에 한국 기독교는 소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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