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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비키와 기가채드, 그리고 한병철

'불안 사회'를 현명하게 버티는 법

by 명지바람

작년 한 해를 정의하는 단어로 ‘원영적 사고’를 떠오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원영적 사고란 불행한 일이 내 눈 앞에 벌어져도 이를 긍정적으로 치환하는 사고 방식을 말한다. 내 눈 앞에 줄이 끊어져 빵을 받을 수 없는 순간, 장원영은 따끈따끈하게 새로 만든 빵을 받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사람은 보통 부정적인 면에 쉽게 이끌리고 거기에 집중하게 된다. 내가 어떤 돈을 잃어버리거나 주식 투자에 실패했을 때, 혹은 시험에서 실패했을 때와 같은 부정적인 기억은 아닌 척 외면해도 그 사람의 그림자 속에 숨어 끊임없이 사람을 괴롭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원영은 긍정적인 순간을 발견해,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한다.


부정적 사고를 이겨내는 것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어느 정도 사건을 냉정하게 바라봐야 할 시간적 여유, 그리고 그 사건이 내 삶을 잠식하지 않게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대할 수 있는 마인드세팅. 긍정적인 사고가 동반해야만 상처를 상처로 남기고 성장할 수 있다. 원영적 사고는 그런 관점에서 마인드세팅을 긍정적으로 바꿔주는 효과를 주고, 이는 서구권에서 말하는 ‘해로운 긍정’과 결이 다른 사고 방식의 차원을 열어준다. 부정적인 현상이나 생각을 한 켠으로 밀어 넣고 끊임없이 긍정적인 것만 바라보게 하는 것과 다르다.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인식은 그대로 가져가되,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끔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동전은 양면이 존재한다. 긍정적인 면 바로 뒤에는 부정적인 면이 있기 마련이다. 남들과 다르게 순식간에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그녀의 태도에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럭키비키’ 밈과 마찬가지로 인터넷에서 기인한 ‘기가채드’ 밈 역시 구조는 럭키비키와 놀랍게 비슷하다. 기가채드라는 가상의 존재가 나를 다독이는 형태의 이 밈은 나 자신의 게으름과 나태함, 패배의식을 깨우치게 도와준다. 때로는 욕설을 가하며 강하게 나를 질책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 앞에서는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이를 극복할 조언을 아낌없이 전한다. 재밌게도 심리학에서 우울증에 빠져 있거나 지나친 패배의식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설득하는데 사용하는 기법이 기가채드 밈에 적용되어 있다. 어쩄든 기가채드는 가상이지만 가상이 아니다.


잘못된 것을 질책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것을 강조하는 기가채드는 이상적인 아버지, 혹은 이상적인 선배의 모습으로 절망에 빠진 개인을 구제한다. 여기서 기가채드는 절대 불가능한 꿈을 이야기하면서 그 롤모델처럼 되는 걸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제보다 더 나은 나’라는 비교 대상을 제시하면서, 과제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강조한다. 조던 피터슨으로 상징되는 ‘레드필’과는 다른 계열이다. 꼰대스러운 말투로 질책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유독하지 않고 긍정적인 면도 강조하는, 온건한 자기 계발의 형태를 띄고 있다.


흥미롭게도 비슷한 시기 등장한 밈들은 공통적으로 불안과 고통 속에 빠져 있는 개인들을 ‘다독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유도하는 밈이다. 몇 년 전 지독한 말투를 사용하며 혐오와 분열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하는 밈들과 다른 형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갑자기 왜 지난 흐름과 다른, 긍정적 사고를 강조하는 밈들이 각광을 받는 것일까? 이에 대해 한병철 교수는 ‘불안 사회 Der Geist der Hoffnung’ 저서를 통해 불안 정도가 심해진 현 사회의 문제점을 꼬집고, 이를 극복할 방법을 제시한다.


그가 제시한 것처럼 지난 몇 년 사이에 불안은 일정 수준을 넘어 폭력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심해졌다. 만연한 혐오로 촉발된 세대 간, 성별 간, 계급 간 갈등은 수위를 넘었다. 상대방을 악마화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모는 것은 예삿일이 되었다. 언어는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며 타자를 철저하게 해체하는데 사용된다. 한병철 교수는 현 사회를 ‘불안사회’로 규정하며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사라진 ‘지금’을 강도 높게 비난한다.


개인의 힘으로는 해결하기 어렵고, 사회의 힘으로는 오히려 문제를 가속화하는 ‘불안’은 AI와 SNS 덕분에 코로나처럼 창궐하고 있다. 구조에서 답을 찾는 이들은 구조에서 절망하고, 개인의 양심에서 이를 해결하려는 이들도 해결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닫고 냉소에 빠진다. 그런 상황에서 한병철은 ‘희망’을 노래한다. 희망은 여기서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잘 될 거야. 미래는 아무튼 좋을 거야.’ 이런 말랑말랑한 사고방식을 견지하자는 뜻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희망은 보다 견고한 성질의 실체다.


희망은 ‘연대’와 ‘우리’를 전제한다. 그는 다 함께 희망의 불꽃을 품는 것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미래를 여는 지평이자,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마중물이라고 희망을 진단한다. 잠재된 것을 완성하고 아직 미분화된 어떤 가능성을 희구하는 것. 그것이 그가 말하는 희망이다. 만질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으며 미래에 반드시 닥쳐올 것. 그 희망이라면 불안이 닥쳐오는 시대를 극복할 수 있다고 그는 진단한다.


불안 사회를 읽으면서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근대’가 떠오르지만 사실 액체 근대 그 너머의 이야기를 한병철은 전달하고 있다. 액체 근대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복합적인 사고와 질병이 만연화 된 사회를 진단하고 거기서 개인은 힘을 잃고 있다고 진단한 것과 달리, 한병철은 희망이라는 제시어로 사람들에게 미래를 꿈꿀 가능성을,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전달하고 있다. 엄연히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희망은 사라지지 않고 후대까지 이어지는 강한 힘이다.


다행히 한병철이 예견한 희망은 사람들 사이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모양이다. 그가 책을 내기 전부터 ‘럭키비키’와 ‘기가채드’로 대변되는 희망의 불씨는 이미 움트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사악한’ SNS와 AI가 불안을 증폭시키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앗아가고 있을 지라도, 사람들은 스스로를 다독이고 미래를 꿈꾸기 위해 어떤 존재를 상상하거나, 사고를 바꾸는 시도를 하고 있다. 프시케의 상자에 모든 것이 사라졌어도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희망’이듯이 말이다.


그러나 희망은 연약하다. ‘백골단’이 부활하고 극우들이 과거의 망령을 소환하며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고 혐오와 불신을 나팔 불며 찬양하는 이 시기. 트럼프가 기후 변화를 부인하며 거짓과 선동으로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시대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정신 차리려고 해도 AI는 점점 사람들의 목숨줄을 조여오고 있다. 중국은 여전히 물건을 생산하며 자본주의 그 자체를 무너뜨리기 위해 비정상적인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멈추고 독재를 찬양하는 이들이 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의구심을 가진 이들이 당연히 많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마인드세팅은 우리를 이 힘든 세계에서 구원할 것이다. 미약한 희망이 거대한 자본과 정치 권력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 손을 잡은 미약한 희망은 세상의 어둠을 뚫어내는 빛이 되었다. 탄핵 선거를 앞두고 응원봉을 휘두르며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외치던 그 순간을 떠올려보라. 연대는 약하고 바스라질 것처럼 보이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원영적 사고와 기가채드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불안에 맞선 이들 속에, 희망으로 자리잡은 밈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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