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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토피아 2

다양성, 그 이면에 존재하는 자본주의

by 명지바람

주토피아2가 9년 만에 돌아왔다. 성공적인 속편이다. 전작의 주제 의식을 그대로 계승했고, 1편의 주인공인 닉과 주디를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관객들이 호평을 늘어놓고 있다. ‘뱀’을 전면에 내세워 파충류를 주토피아 주민으로 합류한다는 아이디어 역시 탁월하다. 이민지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다양성을 포용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가치라는 걸 강조하는 변주 역시 좋다는 의견이 상당하다.


트럼프 중심의 미국 중심주의가 미국의 새로운 가치를 대변하고, 백인 중심 사회를 미국의 사회라고 치환하는 가운데, 디즈니가 내세운 주토피아 2는 이러한 변화를 전면에서 반박한다. 미국이 위대해진 이유, 그리고 미국이 모든 이들을 포용할 수 있었던 건 다양성을 인정하는 태도라고 이 영화는 역설한다. 에이미 추아 교수가 저서 ‘제국의 미래’에서 다양성을 제국의 1번 가치라고 말한 이유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다양성은 곧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저항력을 의미한다. 제국으로 군림했던 영국과 네덜란드는 전성기 시절, 다양한 민족과 사고 방식을 가진 이들을 포용했다. 유대인들과 개신교 상인들도 자유롭게 상행이 가능했던 시기에, 이들은 급속도로 발전했고 문화적, 경제적, 군사적 성장을 거듭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을 통해 전세계 인재들을 빠르게 미국에 흡수했고, 이를 토대로 끝없는 발전을 거듭해 지금의 미국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성’은 미국에게 있어 제1가치다. 여러 미 행정부에서 이를 부인하지 않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최초로 부정하며 백인 위주의 발전, 백인의 사회를 천명하며 외국인들과 ‘배반자’들을 겨누며 이들을 쫓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주토피아의 메시지는 시의적절한 메시지라 볼 수 있다. 다시 한번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백인 위주의 가치를 내세우는 이들을 쫓아내자!


겉으로 내세우는 가치는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주토피아 2를 보면서 내내 불편했던 부분이 있었다. ‘다양성’ 이면에 있는 자본주의적 가치, 확장과 개발에 대한 부분은 언급을 안하고 넘어간다는 점이다. 시리즈의 메인 빌런으로 나오는 링슬리 가문을 살펴보자. 이들은 빼앗은 특허를 이용해 부를 축적하고, 시장까지 발 밑에 두는 인물로 나온다. 시장을 갈아치울 수 있다는 걸로 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문으로 묘사되고, 이들은 누대에 걸쳐 주토피아 이면의 제왕이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시리즈에서 이들이 파충류 세계를 없애려고 한 것은 단순히 ‘달라서’ 이들을 없애려고 한 게 아니다. 오직 돈, 재개발을 통한 막대한 이익 때문이다.


만약 파충류들이 사는 ‘마쉬타운’이 개발 가치가 없었다면, 이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늘 그러했듯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파충류들을 ‘천민’ 취급하는 것에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돈이 개입했기에 이들은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며, 파충류들을 제거하는 데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종족 갈등 이전에 ‘돈’이라는 현실적인 문제, 자본주의적 욕망이 갈등의 이면에 깔려 있다는 게 확인된다.


이 점에 주목해 주토피아 세계를 살펴보면, 절대 이들이 사는 세계는 공평하지 않다. 닉과 주디가 사는 곳과 다른 동물들이 사는 세계에는 분명한 계층적 차이가 보인다. 닉이 사는 공간을 다시 생각해보면, 대형 헬스클럽 지하에 위치한 공간이다. 주디는 어떠한 가, 옆방의 소리를 들어야 할 정도로 개인 공간이 담보되지 않은 좁은 방에서 사는 인물로 묘사된다. 반면, 링슬리 가문은 대저택을 소유하고, 넓은 공간을 마음껏 누리는 인물들이다.


결국 ‘주토피아’는 엄밀한 의미에서 동물들의 ‘이상낙원’은 아닌 셈이다. 현실적인 장벽, 그러니까 돈과 계급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그 차이를 동물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며 사는 세계인 것이다. 더 쉽게 말해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에, 동물 스킨을 뒤집어쓴 것이나 다름없는 세계인 것이다. 디즈니식 화풍이 이러한 세계의 몰입을 가로막고, 자본의 영향력을 최대한 감추려 하지만, 불쑥 튀어나오는 자본의 개입을 우리는 영화 내내 마주하게 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동물들의 세계(포유류)는 평등하지 않으며 주토피아 시민들은 자본에 의해 구획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주토피아 세계 너머, 이들의 세계에 편입되지 않은 파충류, 조류, 해양동물의 세계가 존재한다. 언뜻 평화롭고 모든 게 조화로운 세계처럼 보이는 주토피아는 위태로운 자본의 세계 끝 단에 위치한 공간인 것이다. 파스텔 톤의 화사한 세계의 이면에는 자본주의가 구축한 차가운 경계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미국인이 아닌 세계에서, 주토피아를 보면 불편한 기분이 드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자본주의는 너무나 당연한 개념이고, 돈에 의한 계급 구분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자연’스러운 공간이 주토피아기에, 이를 언급하지 않고 ‘다양성’만 지적하는 주토피아 세계에서 미국 시민이 아닌 이들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주토피아는 사실 전혀 당연하지 않고, 문제적인 세계이며, 언제라도 작은 충격에 무너지기 쉬운 세계다.


‘디즈니’라는 마법이 존재하는 한, 주토피아는 계속해서 시리즈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의 찬사를 받겠지만 나는 여전히 이 세계에 속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적당한 수준의 불편’만 언급하고, 진짜 불편과 위화감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이 세계는 자연스러운 세계라기 보다 인공적으로 축조된 정원과 같다. 후속 시리즈에서도 비슷한 주제를 언급하며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만 주구장창 얘기할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문제인 자본의 이야기도 다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뭐 결국 이 악물고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닉과 주디 귀여워’라는 한 마디에 묻힐 게 뻔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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