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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보라색 연필을 깎고 있었다.

산다이바나시 : 강, 시계, 연필

by 명지바람

그녀는 보라색 연필을 깎고 있었다.


코 끝에 짙은 흙냄새가 가을 나무를 타고 교실로 들어오는 때였다. 푸른 나무가 붉고 노란 가디건을 입으며 사그라들 시기, 저녁 노을을 받으며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그녀는 연필을 깎고 있었다. 연 보랏빛 색연필. 성격이 꼼꼼했는지, 깎은 연필의 겉면을 보니 촘촘하게 껍질이 갈려 있었다. 늦게까지 뭐하냐는 내 질문에 그녀는 깜짝 놀라며 날 올려다봤다.


늦게까지 과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빨리 집으로 가 학원을 가거나 노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과외 활동으로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던 시간이 많았고, 그녀는 보통 일찍 집으로 가는 편이었다. 무엇인가 그리도 급한 지, 종이 울리면 누구보다 빠르게 밖으로 나가는 걸 종종 봤었다. 그런 그녀가 늦게 남아 있다는 게 나로서는 특이한 일이었고, 그녀는 내가 말을 걸 지 몰랐는지 나를 보며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묘한 교착 상태를 깨뜨린 건 길 밖을 요란하게 지나가는 사이렌 소리였다. “그림 그리는데 색연필이 짧아져서, 그걸 깎고 있었어” 그녀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그림?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지 모르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미술을 전공하고 있었다. 이제서야 그녀가 학교 끝나고 부리나케 나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미대를 가고 싶었기에, 학교 끝나고 화실에 가서 계속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녀는 집에 가 봐야 겠다며 빠르게 짐을 싸서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렇게 그녀와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녀와 같은 공간에 오래 있어서, 어느 정도 그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나는 아무것도 그녀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대만 혼혈. 아버지가 대만인이고 어머니가 한국인이었다. 수줍어 보였던 그녀의 모습은, 사실 한국어가 어설픈 것을 감추기 위해서 였다. 집에서는 대만어를 쓰고, 밖에서는 한국어를 쓰지만, 억양에서 ‘토종 한국인’스러운 느낌이 안 난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전혀, 너 말하는 거 한국인이야” 나는 그녀의 말에 강하게 부정했다. 뭐래, 그녀는 퉁명스럽게 내 말을 부정했다. 아이스크림을 홀짝이는 그녀는 편안해 보였다. 어느 정도 친해지자 그녀는 보통 성격이 아니었다. 가만히, 그리고 조용히 있는 건 그녀 성격에 굉장히 답답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망부석처럼 있는 게 삶에 있어서 굉장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글 같은 고등학교 사회에서, 그녀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었다.


그녀는 종종 강을 걸었다. 탄천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악취가 났던 탄천은 개발 사업 덕분에 깨끗해 졌고,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때 느껴졌던 악취는 이제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이 잘 찾지 않는 강을 걷는 걸 좋아했고, 나도 그녀를 따라 강을 걷게 되면서 우리는 종종 강을 따라 이야기를 많이 했다. 재잘거리며 그날 있었던 일, 그리고 재밌게 봤던 만화 이야기, TV에서 봤던 어떤 연예인의 이야기 등등 다양한 이야기를 공유하며 점점 그녀와 친해졌다.


그녀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가족이었다. 혼혈 때문에 생긴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의 동생은 중증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이다. 가면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하는 동생을 케어하느라 온 가족이 동생에게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동생을 보호하느라 그녀는 지쳐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도피처이자 행복한 장소는 그림이었다. 동생이 폭력을 휘두를 때면, 그 폭력을 피하기 위해 열심히 상상의 장소로 그녀는 매번 도망쳤다. 미대를 가기로 결정한 것도, 동생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 였다.


“미국이나, 독일로 가면 좋을 거 같아” 담담하게 미래 계획을 이야기하는 그녀는 입술이 파랗게 변해 있었다. 나는 담요를 덮어주며, 그녀의 입에 초콜릿을 넣어 주었다. 새 모이처럼 초콜릿을 받아먹은 그녀는 달콤하다며 또 달라고 입을 벌렸다. 어쩔 수 없이 초콜릿을 까서 건네주니 그녀는 그걸 또 맛있다며 먹었다. 추우면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지만, 그녀는 강물을 보고 싶다고 했다. 가만히 앉아 흘러가는 물을 보는 게 즐겁다고 말한 그녀는, 담요를 꽉 끌어안으며 몇 시간이고 천변에 앉아 있었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앞 서거니 뒤 서거니 하며 점점 빨라졌다. 그래도 이 짧은 행복과 즐거움을 공유하며, 청춘을 만끽하던 이 시기를 그녀가 꼭 기억하기 소망했다. 그 날 역시 가을 햇빛이 창문을 꿰뚫으며 코끝을 간지럽히던 가을의 문턱이었다. 갑자기 그녀가 모습을 감추었다. 자초지종을 들으니 그녀의 가족이 대만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그녀가 갑작스럽게 한국을 떠날 줄은 몰랐다며, 이미 너는 알고 있을 줄 알았다고 뒷말을 붙였다. 아무래도 그녀와 자주 이야기한 게 나였으니, 선생님은 먼저 이 소식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넘겨 짚은 모양이었다. 허무했다. 나름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하고, 걱정도 했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떠날 줄은 몰랐다.


그 날도 과외활동을 마치고 반으로 돌아갔다. 노을이 길게 뻗어 있었고, 하늘은 핏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름다웠다. 나도 모르게 그녀가 앉아 있었던 창가 자리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 늦게 그녀가 바라보던 하늘은 이런 모습이었을까. 상념에 잠겨 있었던 나는 책상 안 쪽 서랍에 손을 넣었다. 문득 손에 무언가 잡혔다. 꺼내 보니 종이와 색연필이었다. 색연필은 연 보랏빛이었다. 잘 깎인 채로, 그녀처럼 꼼꼼하고 정갈한 모습을 보이며 서랍에 있었다.


종이에는 그녀의 편지가 있었다. 그녀가 간 뒤로 이 책상에 손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도 손을 대지 않아서 이런 편지가 있는 줄 몰랐었다. 큰 글씨로 그녀는 대만으로 돌아간 이유를 설명했다. 병이 심해진 동생을 한국에서 돌보는 게 무리라 판단한 가족은, 고향인 대만으로 가기로 결정했고, 자신도 꿈을 포기하고 동생을 돌보려고 한다는 말. 미술은 취미로 하면 된다고 말한 그녀는 담담하게 자신의 행복한 일상을 적어 놓았다.


강을 걷던 일, 늦게까지 남아 사소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던 일, 행복하게 초콜릿을 나눠먹었던 시간. 나는 담담하게 적힌 그녀의 일상을 고이 접어 품 속에 넣었다. 딱히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가 가슴 한 켠에 밀어 두었던 행복이 떠올랐다. 그 시간은 내가 그녀와 나누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연 보랏빛 색연필을 꺼낸 나는 책상 위에 그녀의 이름을 적었다. 한국어 이름과, 그리고 그녀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대만어 이름을 말이다.


가방을 들고 밖으로 빠져나오려 했지만, 다시 그녀의 책상 앞으로 갔다. 한국어와 대만어 이름이 나란히 있었다. 급하게 나는 하나의 이름을 지웠다. 그것이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르겠다. 내가 올바른 이름을 지웠던 것이 맞는지, 아니면 제대로 지웠던 것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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