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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잰니 Oct 02. 2024

객석의 나는 너를 올려다보며

다시 만난 너의 이름, 위기

조짐은 있었다. 갑자기 마주하게 된 남는 시간 속에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 그동안 너무 바빠 돌보지 못했던 관계, 친구들과의 갑작스러운 만남, 스트레스 해소되는 운동, 촉감을 활용한 요리. 이를 모두 실현하고 나서야 '이대론 안 된다'라고. 영어 공부, 직장인 뮤지컬 모임, 글쓰기 수업..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우선순위를 정할 수 없었다. 뚜렷한 방향이 없었으니까. 결국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했다.


모든 전개에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기 마련이다. 마치 신이 던져주기라도 한 것처럼. 내 경우엔 극적이었다. 그러니까 소위 '최애'라고 표현할법한 가수의 콘서트장이었다. 나는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스탠딩석에 서서 끝내주게 공연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명은 가수가 반짝이게 도울뿐. 그의 기량과 에너지가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그럼에도 가수 혼자 공연을 만들 순 없는 법. 스탭, 댄서, 세션 그리고 관객. 공연에 가면 으레 이들도 관찰하곤 한다. 한데,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그것도 무대에. 내 최애에게서 멀지 않은 뒤편 공간에.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내가 연주하면, 너는 노래를 해."


이십 년 전. 악기를 배우게 됐다는 소식 끝에 이 말을 덧붙였던 소년이 예전 그대로의 얼굴로 연주를 했다. 문자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게 너무 두근거려서, 문자를 보낼 때마다 얼른 옷장 서랍 칸에 빨간색 모토로라 휴대폰을 집어넣게 만들었던 친구였다. 머지않아 나는 멀디 먼 곳으로 이사를 갔고 우리는 이별 아닌 이별을 맞이했다. 이후로, 연락한 적은 없지만 알아주는 연주자가 되었다고 듣긴 했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집중력이 산산조각 났다. 아아, 이러면 안 돼. 얼마짜리 공연인데. 집중하자, 집중. 아티스트에게.


공연 절반이 지나고, 가수가 잠시 무대 뒤로 사라졌을 때. 관객들이 한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순간이 있다.

이번에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다시 몰입에 성공한 나도 목소리 높여 노래했다. 많은 인원이 노래를 하려니 박자가 엉망이 됐다. 그때. 가려진 무대 위에서 반주가 흘러나왔다. 세션들이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아이 연주에 맞춰 내가 노래를 하는 일이 진짜가 됐다. 그러니까 이십 년 만에. 이런 식으로 이게 이뤄진다고. 마법 같은 순간, 달콤한보다는 씁쓸함이 휘몰아쳤다.


다시 스무 해 전, 그 말을 들었을 때의 나는 다른 장면을 상상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조명이 쏟아지는 바로 그 무대 위였다. 내 손엔 야광봉이 아니라 마이크가 쥐어져 있다. 하지만 실제의 나, 현재의 나는, 가장 가깝긴 하지만 무대 아래에 좌석도 없이, 무릎과 고관절이 아파 한 번씩 몸을 아주 작게 움직여 스트레칭을 해줘야 하는 구역에서, 그 많은 해외 팬들과 함께 있었다.


"소심했던 저와 달리, 그 친구는 초등학교 때 끼가 많았어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해요."

쑥스러워하는 스타는 스튜디오에서 긴장한 채 VCR을 본다. VJ는 아파트 현관 앞에서 인터폰으로"누구 씨 맞나요?" 묻고, 아주 작은 틈만 열어서 얼굴을 확인하곤, 카메라를 보며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다. 슬로 모션으로 현관문이 열리면, 자못 평범한 여성의 얼굴이 드러난다. 뒤편으로는 아이 있는 가정집 살림이 그대로 보인다.


어릴 때 하도 봐서 여전히 선명한 예능 프로그램 장면이다. 그 프로그램을 볼 때 언제나 그 스튜디오에 있는 사람에 이입했다. 결혼한 첫사랑을 만나게 되면 기분이 어떨까 하면서. 맹세하건대 단 한 번도, 아파트 현관 안에서 촬영팀을 맞이했을 시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놀랍지도 않게, 나는 경기장 한가운데에서 그 여자가 되어 있었다.


콘서트가 끝나도 씁쓸함은 계속되었다. 내내 잊고 살았던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성공하고 싶다. 상대적인 거라고 해도, 나 스스로 인정할 수 있을 성공. 십 대 시절 내다보았던 먼 훗날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 간극이 너무 컸다. 내 안의 어린이가 바닥에 퍼질러 앉아 엉엉 우는 듯했다. 이건 아냐. 이렇게 계속 살 순 없어. 이렇게 살다 간 영영 이렇게 살 수밖에 없을 거야. 단 한 번뿐인 인생이잖아.


십 대, 이십 대. 아니, 삼십 대 초반이기만 했어도 이런 감정은 느끼지 않았을 거다. 이런 식의 위기감 대신, 그럭저럭 희망과 패기가 있었다. 지금은 아직 어리니까, 요즘 취업 시장이 쉽지 않으니까, 이제 사회 초년생이니까. 생계는 중요하니까 이건 임시야. 내 진짜 일을 찾을 거야. 자잘한 변명이 먹혔다. 흰머리가 셀 수 없이 많아진 30대 중반. 나는 늙고 있다.


midlife crisis. '중년의 위기'. 40대의 불안감을 의미하는 단어. 최근에는 위기감도 선행학습을 하는지, 조금 더 빨리 찾아와 mid thirties life crisis 가 생겼단다. 30대 중반의 위기다. 고령화 사회에 수명이 길어질수록 위기는 고조되어만 갈 텐데, 야속하게도 더 일찍 찾아온 손님이 되었다. 이 손님은 어떻게 대우하면 좋을까. 나는 일종의 도박을 해보려 한다. 어쩔 수 없이 동거해야 할 감정이라면, 모험이라도 하겠다는 속셈이다. 그 도전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위기의 덩치를 키울 것이다. 그래도 최악의 냄새를 풍기는 '후회'라는 쓰레기를 만들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다. 


10월의 첫날. 미연시를 시작한다. 공략법도 잘 모르고, 마음에 안 드는 엔딩이라고 해서 다시 처음으로 키울 수도 없다. 이 프린세스는 더 이상 아빠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약속 지켰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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