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한번일지라도

'꿈의 제인'과 박원과 한강.

by 잰니
"좋잖아요. 어쩌다 한번 행복한 오늘 같은 날."
- '꿈의 제인' 중

꿀 같은 휴무일. 카페에서 여유로이 차 한 잔 하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화요일까지 다큐멘터리 아이템 생각하고, 목요일까지 작문 쓰고.. 하는데, 매우 뜬금없이, 언젠가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봤던 영화 '꿈의 제인' 예고편이 생각났다. 제목이며, 색감이며, 주인공 '제인'의 목소리부터 배경음악까지. 1초 만에 나를 사로잡았다. 앞선 계획들에 줄을 죽죽 긋고, 영화를 예매했다.




마트에 갔다.

봉골레 파스타가 먹고 싶었는데, 혼자 가서 먹을 만한 식당이 없었다.

대학가에 파스타 하나 먹을 데 없다니. 엄마와 푸념 어린 통화를 마치고, 오랜만에 요리할 생각을 했다. 3개입에 2,000원쯤 하는 보랏빛 가지와 파스타면, 마늘, 식감이 재밌는 우렁을 샀다. 곁들여 먹을 싱싱한 채소들, 닭가슴살과 아침 대용으로 먹기 좋은 바나나도 구입했다. 장바구니가 무거운 만큼 마음도 든든했다.


그러고부터는 헬스 키친.

분리형 원룸이라 침실에 냄새 안 배여 좋을 줄 알았건만. 덕분에 지옥에 온 듯한 더위를 느낄 수 있었다. 나한테 모공이 이렇게나 많았나 새삼 깨닫게 해 준 핫 샤워. 극한의 허기에 파스타 양 조절에는 실패했지만 끝끝내 다 먹어냈다. 역시 우렁 식감이 재밌었다. 다음에는 소금을 많이 쳐야지.




밤 아홉 시. 긴 여정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질풍노도의 대학생 시절, '내 마음대로 못 하는 게 마음뿐이랴' 하는 당돌한 심정으로 댄스학원에 다닐 때 타던 버스를 탔다. 버스는 제시간에 영화관 앞에 도착했다. 어둑한 조명, 마감 준비하는 알바생을 지나 묵묵히 상영관에 들어갔다. 역시나 소수의 사람들뿐이었다.



꿈의 제인. 감탄했다.

나도 몰랐다. 내가 소수자 얘길 좋아한다는 걸. 소수자라서 좋은 건 아니고, 그냥 좋아하다 보면 그들이 소수자더라. 예고편보다 몇 배는 좋았고, 군중 속 '현실의 제인'이 지그시 미소 띤 얼굴로 소현을 바라보는 장면에선 마음이 뜨끈했다. 우리 불행하지만, 이 곳에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여의나루 역이요."

택시를 잡았다. "지하철 다닌답니까?" "끊겨도 괜찮아요."

꽤나 사치스러운 발언이었지만, 신의 한 수였다. 택시는 한강을 따라 달렸고, 최대한 내려진 창문으로는 강풍이 불었다. 검푸른 강과 색색의 가로등, 건물 불빛. 지하로만 다녀 몰랐다.

서울 야경이 홍콩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걸.



현장을 충분히 즐기느라 찍지 않았던(혹은 카메라가 구려 찍지 못했던) 풍경을 새로 산 드로잉북에 그려봤다.


1년 전 그 날처럼. 멀리서 공연장을 알리는 스탠드를 향해 재게 걸었다.

이전보다 많아진 무리. 가까워질수록 소리가 분명해졌다. 12시 딱 맞춰 도착했는데도, 설 공간이 없었다. 겨우 사람들 틈을 비집고 섰다. 그 와중에 탄산수 터뜨려서 앞자리 돗자리 관객에게 민폐 끼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전엔 아는 노래보다 모르는 노래가 더 많았는데, 튜닝하는 소리에도 곡명을 알아맞힐 지경이 되었다.


공연 자체는 지난번이 훨씬 좋았달까. 규모가 작았던 만큼 관객끼리 결집도 잘 되고 소통도 원활했는데.

마포대교를 지나는 관심 필요한 시민들과 폭죽의 아름다움에 눈먼 시민들 때문에 영 방해가 됐다. 여전히 '저 사람이 누구냐, 유명하냐' 묻는 사람이 있었지만, 첫 소절 시작하자마자 "어? 이 노래!" 하는 사람도 있었다. 괜히 자극. 난 그간 얼마나 성장했나.




느지막이 집에 돌아왔다.

이전만큼 새벽 택시가 무섭진 않았다.

'오늘 같은 하루라면 크게 아쉽지 않을 것 같아.' 극단적인 생각 탓이긴 했지만.

꿈의 제인과 박원과 한강.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넘실댔다. 굳이 도리질 치지 않고 잠을 청했다.

어쩌다 한번 행복한 오늘 같은 날. 참 좋았지. 그럼 됐어.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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