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인식 속에 낙인 찍히는 여성들
"응, 엄마. 나 지금 수제비 해 먹으려 하는데 반죽에 물 얼마나 넣어야 돼?"
상당히 독립적인 척 하지만 결국 수제비 반죽 하나 할 때도 엄마를 찾는 나는 소위 '마마걸'이다.
정신적으로 많은 부분을 의존하는 느낌이다. 아니, 의존이라기보다는 의탁에 가깝다.
나의 한 부분을 엄마에게 뚝 떼어내 맡긴 느낌. 엄마를 제외하곤 나를 설명하기 어렵다.
이제 조금 있으면 엄마가 날 잉태했던 나이가 된다. 엄마와 나 사이엔 약 삼심 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이 있어서, 내 아무리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어도 엄마는 늘 서른 발자국씩 나보다 앞서 있으리라.
그 세월에 부딪히고, 아프고, 다시 이겨낸 힘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아주 사소한 것부터 큰 결단이 필요한 일까지. 나 스스로 생각에 한계가 오면 늘 엄마를 찾는다.
그래서일까.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면 혜원의 엄마는 혜원이 수능 치고 돌아온 날 집을 나간다. 그저 열아홉의 나이. 고모 한 명 있는 그 시골집에 딸을 혼자 두고 나가다니. 어떤 이유를 대든 이해 못할 일이라 생각했다.
혜원이 극 중에서 엄마가 남기곤 간 편지를 부득부득 구겨 던져버릴 때, 나도 속으론 그를 응원했다.
'구질구질한 변명 따위 읽어줄 것 뭐 있어.' 하고.
그런데 그 편지를 다시 읽는 부분에 완전히 설득돼버렸다.
완벽한 복원은 아니지만 대충 이런 얘기였던 듯하다.
한 인간에게 자식은 농부의 작물과 같을 수 있겠구나.
영화에서 혜원과 그의 엄마가 나무 아래 앉아 토마토를 먹고 던지는 신이 나온다.
혜원 모는 그렇게 아무렇게나 던져도 다음 해 보면 잘 자라 있다는 얘길 해준다.
작물도 한 해면 모두 자라는데, 사람을 스무 해 가까이 키웠으면 다 키운 것 아닌가.
어쩌면 스무 해 동안 옆에서 품어주고 돌봐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아닐까?
어쩌면 나는 다 컸음에도 부슬부슬한 흙 속에 파묻혀 썩어가는 작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체, 엄마는 한 인간의 역할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지나칠 정도로 신성화 혹은 신격화되어 있다.
엄마란 타이틀은 너무나 강력해서 그가 원래 갖고 있던 이름마저 지운다.
영화에서 문소리 배우의 역할이 이름 대신 '혜원 모'로 지정되어 있는 것과 맞닿아 있다. 여성들은 엄마가 되는 것만이 유일한 일인 것처럼 대우받는다. 엄마가 되는 일은 그렇게 숭고한 일인 것처럼 포장되면서, 여성의 생리 사실은 숨기고 지운다. 흉물스러운 것으로 취급된다. 어불성설이다.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703837&no=26
네이버 웹툰 <아기 낳는 만화>는 여성의 임신부터 출산까지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지금은 조금 사그라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초반에는 작가가 메갈이라는 둥 이상한 말이 나온 바 있다.
이 외에도 각종 SNS에서 임신 후기 등이 유행하는데 그들에게도 자못 날 선 비난이 가해진다.
사회 전복이나 대단한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여성이 겪는 고초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만으로 비난받는 일이 참으로 암담하게 여겨진다.
반면 미혼 여성들은 미처 배우지 못했던 임신·출산의 면면을 간접 체험하고
사회 구조와 의식에서 비롯된 부조리에 놀라워하는 모양새다. 남녀 구도로 갈라 싸움을 붙이는 게 아니다.
부조리한 현실은 외면하고, 저출산 대책으로 성형수술 세제 혜택을 언급하거나 가임기 여성 지도나 만들어내는 안일한 사고방식에 쓴소리를 하고 싶을 뿐이다.
세상을 돌보는 일이지만 육아보다 정당화하기가 좀 더 어려운 모든 일 … 내가 말하는 그런 일이란 글을 쓰고, 발명하고, 정치 활동을 하고, 사회운동을 하는 일이다. 글을 읽고, 강연하고, 시위하고, 가르치고, 영화를 만드는 일이다 … 인간 조건의 개선이 뒤따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일들은 대부분 육아라는 실제적이고 창의적인 작업과 병행하기가 엄청나게 어렵다.
리베카 솔닛이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서 작가 크리스티나 럽턴의 표현을 인용한 부분이다.
저 구절을 읽고 뇌에 전기가 돋친 듯했다. 그간 딸로서만 존재했을 뿐 단 한 번도 엄마로서의 미래를 상상해본 적 없었다. 그전에 결혼 자체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비혼 주의자도 아니다. 너무 현재만 생각하는 나머지 미래를 전혀 생각하지 않아서일까. 저 구절을 읽고 처음 결론 내렸다.
'아, 나는 출산할 수 없겠구나. 하게 되거든 불행한 인생을 살겠구나.'
내가 행복하다고 여기고, 스스로의 존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모든 일들이 육아와 병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언급한 책 속 구절을 읽던 나는, 갑갑한 집에서 나와 실로 오랜만에 창이 넓은 카페에 앉아 드립 커피 한 잔에
치즈 바른 베이글을 즐기고 있었다. 강아지 한 마리 집에 두고 오는 것도 마음에 밟혀서 괜히 바깥에서 누리는 내 행복이 미안한 것이 되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 강아지를 돌봐야지.' 그런 마음을 겪던 터였다.
"네가 날 두고 나가버려서 외롭고 속상했어."
이런 말조차 하지 못하는, 낑낑거리는 일조차 없는 강아지 한 마리만 두고 와도 이럴진대,
발버둥 치고 울고 서러워하고 나중에 "엄마에게 인생에 다시없을 상처를 받았어."라고 말할 줄 아는 아이를
키우게 되면 도대체 얼마만큼의 미안함과 죄책감을 가지게 될까. 퍼뜩 겁이 났다.
소위 '나쁜 엄마'가 될까 봐 겁이 난 셈이다.
리틀 포레스트처럼 일본 원작인 작품 <마더>가 최근 종영했다. 배우 이보영 씨가 강수진 역할을 맡아 친자식이 아닌 혜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얘기다. 드라마에는 다양한 엄마가 등장하는데, 드라마 자체보다 주인공이었던 배우 이보영 씨의 인터뷰가 더 인상적이었다.
"주변에서 '모유수유 이렇게 하면 안 된다' 등 다들 자꾸 저를 혼내는 거예요."
"아기는 아빠가 안는 게 더 편해요. 어느 날은 제가 남편이랑 아이 옆에서 대본을 보고 있었거든요. 어떤 할머니가 남편한테 ‘고생이 많아'라고 하시더라고요. 말없이 남편 등을 두드리고 가시는 분들도 많고요. 처음에는 의식 안 했는데 나중에는 제가 나쁜 엄마가 된 기분이 너무 싫었어요. 남자가 아기 띠 하면 '역시 대단하다'라고 하고 제가 하면 '뭐 힘들다고 하냐'라고 그러고."
이렇게 육아, 돌봄 관련해 여성과 남성에 거는 기대 자체가 다르다.
너무나 당연히 여성에게 가정 내 돌봄을 강요하고 그러지 않으면 이기적인 사람이라 여긴다.
더불어 배우 이보영 씨는 '여배우'라는 타이틀에 얽힌 고정관념과 이미지 탓에 더 가혹한 평가를 받아야 했으리라.
사람들은 아이 없는 사람에게 그 동기를 캐묻고 그가 부모 역할에 수반되는 희생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하지만, 거꾸로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 밖의 세상에 베풀 사랑이 그만큼 적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종종 간과한다.
리베카 솔닛,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꼭 아이를 나아야만 여성으로서 삶의 가치가 생기는 것일까. 아이를 낳았을 때 꼭 나의 모든 일을 포기하고 매달려야만 올바른 양육이 되는 걸까. 그래서 <리틀 포레스트> 속 혜원 엄마와 배우 이보영 모두 나쁜 엄마인 걸까.
"아이를 낳고 키우기에는 환경이 그렇게 좋은 것 같지는 않아요. 어린이집을 보내려고 해도 대기가 300번이 넘고, 일을 관둬야 하는 경우도 많고요. 사회의 도움 없이는 키울 수가 없어요.…이런 사회에서 아이를 낳으라고 권유할 수는 없죠. 사회적으로 제도가 필요한 것 같아요. 육아휴직을 남녀 다 쓸 수 있고, '칼퇴'해도 눈치 안 주는 등 제도와 인식이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배우 이보영 씨 말에 적극 동의한다. 제도 차원의 도움이 있어야 하며, 인식 자체도 바뀌어야 한다.
출산하는 당사자가 여성이라고 해서 돌봄 노동이 오롯이 여성 몫이라는 인식.
그로 인한 경력 단절 및 선제적인 차단 같은 일이 발생해선 안 된다.
비정한 엄마, 나쁜 엄마라고 비난하기 전에 어떤 짐을 떠맡긴 채 내팽개쳤는지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