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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잰니 May 10. 2022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

잃은 게 내가 아니라 다행이야.

어릴 적 그런 장난감이 있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샀던 걸로 기억하는데, 손바닥만 한 카메라 장난감이다. 안에 있는 그림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어있고, 찰칵! 버튼을 누르면 다음 그림, 또 다음 그림으로 넘어간다. 영화 소공녀에서 세라가 열쇠 구멍 틈으로 인형들의 세상을 상상하며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 조그마한 카메라 안에 있는 세상을 보는 일을 좋아했다. 그 그림은 절대 꺼내 볼 수 없었고, 그 카메라 안에 마냥 갇힌 것처럼 보였다. 영화 스펜서는 카메라 워킹이 마치 광고처럼 자유롭고, 명화를 그려내는 것처럼 연출한 장면이 많다. 아름답지만, 뭔가 답답하다고도 느꼈다. 어릴 적 갖고 놀던 그 카메라 장난감 속 그림을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무엇이 엄마를 슬프게 하나요?”


크리스마스이브. 이미 모든 선물을 열어 본 윌리엄과 해리는 엄마인 다이애나와 게임을 한다. 그러곤 묻는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들고, 비틀거리느냐고. 엄마를 가장 잘 아는 건 아이들이다. 엄마는 아이의 세상이라, 그 안에 언제나 살고 있으니까. 극 중에서 다이애나가 뭐라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후반부 아들과 자동차를 타고 별장에서 달아나 KFC 드라이브 스루를 이용해 감자튀김을 먹는 장면에서 느꼈다. 그녀는 궁에 맞지 않는 사람인데, 궁에 갇혀있어 불행했구나. 그녀는 궁에서 자몽 수플레를 먹는 것보다 런던에서 감자튀김 먹는 게 더 행복한 사람인데. 결국, 스스로 답지 않게 살고 있어서, ‘나’를 잃은 채 살아서 슬펐구나.


영화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 생각했다. 잃은 게 내가 아니라 '그'라서 다행이라고. 그와 내내 함께이고 싶었다. 언제 내리게 될지 몰라도, 지금 이 정류장은 아니었다. 아직 봐야 할 경치 - 이를테면 벚꽃이나 바다, 같이 보러 가기로 했던 별 같은 - 가 많이 남아 있었고, 가봐야 할 밑바닥도 많이 남아 있었다. 서로 나눠야 할 감정들도. 하지만 헤어지지 않았다면 결국 '나'를 잃었을지 모른다. 스펜서의 비극 앞에 내 비극은 어쩐지 다행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릴 적 갖고 놀던 장난감 카메라 속 풍경, 시력검사를 하기 위해 들여다보는 장비 속 열기구 혹은 작은 집처럼. 다이애나 스펜서는 실은 궁이 아니라 미디어의 프레임 안에 갇혀 있던 게 아닐까. 옷 갈아입는 모습이 찍힐까 창문 하나 못 열어두지만, 틈틈이 문을 열고 겨우 한숨을 돌리면 커튼을 박음질하여 붙여버리고. 프레임 밖이라고 다를 건 없다. 제멋대로인 왕세자비라고 이미 판정해버린 왕족들과 사용인들 속에 있노라면, 내연 관계에 있는 여인에게 준 것과 같은 목걸이가 아니었더라도 목줄 찬 듯 답답했을 테다.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도 상영시간 내내 질식할  같은 갑갑함을 느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호화롭고 아름다운데, 어쩐지 입에 마구 쑤셔 넣는 케이크처럼 기름진 느낌. 이는 영국 왕실의 엄격한 규율 탓이 아니라, 나다울  없는  때문이라 느꼈다. 내가 아닌 '꼬리표' 사는 삶에 대한 간접체험이랄까. 그는 자신을  자체로 봐주는 매기와 바닷가에서,  혼자 들판에서 뛰어다닐  비로소 자유로워 보였다.


내가 나다울  없다는 것은  고통이다. 내가 먼저 나를 인식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문제 되지 않는 환경도 필요하다. 그를 기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주는 가까운 사람들도 필수적이다. 생각보다 적지 않은 사람이 나를 숨기고 산다. 내가 아닌 다른  혹은 꼬리표를 쥐고 살아간다. 사회가 바뀌고 있다고 쉽게 말하진 못하겠다. 다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사람이라도 본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사람과 함께 하기를. 내가 나다울  있는 사람과 함께   있기를 바라본다.


다이애나 스펜서의 마지막을 함께한 그 사람은 과연 그를 있는 그대로 봐준 사람이었을까? 그렇길 바라본다. 그럼 그의 삶이 그렇게 비극만은 아닐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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