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를 주는 꽃들
Mrs. Dalloway said she would buy the flowers herself.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다.
이 문구를 처음 접한 건 역시나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에서였다.
영화 소개를 잠깐 하자면, 빌리 엘리어트, 더 리더 등을 연출한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로, 영화제 최다 노미네이트 기록을 가진 메릴 스트립, 우아하면서도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매력의 줄리안 무어, 내 사랑 나의 사랑 니콜 키드먼이 모두 출연하는, 그야말로 연기력 구멍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작품 되시겠다.
세 여인이 모두 그 구절로 이어져 있다. 버지니아 울프 역의 니콜 키드먼은 직접 그 구절을 쓰고, 줄리안 무어는 그 구절을 책에서 읽으며, 메릴 스트립은 진짜 꽃을 사는 댈러웨이 부인이 된다. 그것뿐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거라곤 그게 다였다. 하지만 이 영화가 주는 알 수 없는 여운에 인터넷 서핑을 즐기다 영화 리뷰와 버지니아 울프의 삶, 문학사적 가치 등을 알게 됐다.
너무 과한 의미 부여일까. 남자로부터 주로 받기만 하던 꽃을, 스스로, 본인을 위해 사는 것.
이는 한 개체로서의 독립을 뜻한다. 여성의 행복은 남성에게 달려 있다는 낡은 관념이 부서졌다.
남성에 대한 의존이 너무나 커, 남성 없이 살 수 없었던 여성이 달라졌다.
스스로 자신의 행복을 찾는 것.
간단하지만 여태껏 쉽게 쟁취할 수 없었던 혹은 아직도 쉽게 쟁취할 수 없는 권리다.
그리 수려한 표현은 아니지만, 그 함의 하나만으로 참 멋진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자줏빛이 곱게 물든 드라이플라워. 몇 달 동안 재활용 병 신세였던 '꽃병'에 꽂아 공부하는 책상 위에 올려뒀다. 벌써 네 번째 손님이다. 종종 꽃을 사 왔다. 꽃을 참 좋아하시는 엄마를 닮아서일까. 좌우 안 보고, 목적지만을 향해 걷는 내가, 꽃집 앞은 좀처럼 그냥 지나갈 수 없다. 어떤 꽃이 들어왔나 보면서 꽃이 나오는 철도 알고, 아름다운 빛깔에 유희도 느낄 수 있다. 일상에서 꽃은 그렇게 눈요기로 소비한다.
일종의 유인책이다. '책상 앞에 앉아 공부 좀 해라!' 같은. 썰렁하고 어두컴컴한 고시반은 참 가기 싫은 공간이다. 누가 믿을지 모르겠지만, 정말 꽃을 두면, 그를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다닐 적, 좋아하던 남자애를 볼 때 마냥, 할금할금 꽃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게 되니까.
벌써 3개월의 방황이다. 나름의 생활 스케줄 안에서 지내고 있지만, 방황하고 있단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엇보다도, 마음 붙일 곳이 없다. 스터디를 새로 구할까, 오전 알바를 다닐까 고민하다, 결국 꽃집에 들렀다.
그래서인지, 요구하는 환경도 귀족적이다. 못 해도 베란다에서 키워야 한단다. 베란다라니!
내겐 다섯 번 구르면 이 쪽 벽에서 저 쪽 벽까지 닿는 좁은 원룸과 닭장 같은 고시반 자리 하나밖에 없다.
눈길을 돌렸다. 이름 모를 꽃들이 많았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고궁뿐 아니라 꽃에 대해서도 공부해보고 싶다.
좋아하는 것은 더 알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지난달, 캐나다에서 1년 반 만에 돌아온 오랜 친구에게 선물한 드라이플라워에 시선이 꽂혔다.
안개꽃보다 예쁜 종류가 있었는데, 지금 찾아보니 '스타티스'라고 한다. 안개꽃보다 꽃 모양이 잘 살아있다. 내가 산 스타티스는 분홍에서 자줏빛이 감돈다.
친구에게 선물한 보라색이 더 예뻤다면, 남의 떡이 더 커 보여서일까.
예전에 내 꽃병을 채워줬던 꽃잎들은 참 곱고 부드러웠다.
매일 아침 물 갈아주고, 조금씩 잎을 펼치는 모습에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해바라기가 피는 것처럼, 나도 활짝 피었으면 좋겠다.'
매일 속으로 되뇠다.
해바라기는 꽤 오래 버텨주다 이내 시들어버렸다. 꺼슬꺼슬하고 메말라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 구겨진 해바라기를 쓰레기통에 버릴 때, 내 꿈도 함께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이미 시들대로 시들어버린 작고 소박한 꽃. 영원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존재를 지켜내는 꽃.
인위적으로 주입한 색깔,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불안함. 이런 것들이 드라이플라워를 선호하지 않게 만들어왔지만, 글쎄, 이제야 내 책상 위에 올려두기 알맞은 꽃을 찾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해서, 지금 내 책상 위에는 자줏빛 스타티스가 꽃병에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