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가씨'와 '엽기적인 그녀'를 중심으로
Put yourself in other's shoes.
중고등학교 시절, 영어 시간에 외웠던 격언.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역지사지'의 의미다.
아메리카 인디언 속담 중에는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기 전에는 함부로 그 사람을 비판하거나 흉보지 말아라'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신발에는 타인에 대한 이해, 공감의 메타포가 있다.
하녀 숙희(김태리 분)가 히데코 아가씨 집에 온 첫날이던가. 동료 하녀들이 신발을 감춰버린다. 숙희의 맨발을 본 히데코는 자신의 신발장을 열어 보여준 뒤, 한 켤레 고르라고 말한다. 자신은 신고 나갈 일이 없다면서. 숙희는 눈을 반짝이며 아가씨의 신발 한 켤레를 받고, 신이 나서 쫓아다닌다. 숙희와 히데코가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것도 이 시점부터다. 히데코는 숙희의 신발을 빼앗아간 하녀들을 찾아내 거칠게 뺨을 때리고, 숙희는 정원에서 히데코와 가짜 백작의 다정한 모습을 본 후 들으란 듯이 쿵쾅대며 실내 계단을 오른다.
+) 사족이지만, 영화 '아가씨'에 등장하는 밧줄은 숙희를 닮았다. 처음에는 히데코의 목을 조르는 밧줄이지만, 나중에는 그녀의 동아줄이 되는 셈이니까. feat.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위의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신발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진 않지만, 숙희는 히데코의 발을 어루만진다. 겉으로는 "백작님을 사랑하게 되실 거예요!"라고 말하지만, 뺨 한번 맞고 쫓겨나면서, 히데코가 줄을 들고 벚꽃나무를 향해 뛰어가는 걸 보면서, 결국 진심을 토해내고 만다. 숙희는 히데코의 신발을 신고 그녀를 이해했다. 그녀의 발을 만지면서 그녀에 대한 사랑을 털어놓는다. 우리의 신체 중 가장 아래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지탱하는 '발'이 서로를 연결해주는 매개체가 된 셈이다.
'그녀'는 너무나 청순한 모습을 하고서, 견우 학교 앞으로 찾아온다.
길을 조금 걷다가 발이 아프다며 신발을 바꿔 신기를 권한다.
견우는 그냥 자기 운동화를 신으라며, 자신은 맨발로 걷겠다고 하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꼭 바꿔 신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울며 겨자먹기로 견우는 하이힐을 신고 괴로워한다. 그녀는 행복해한다.
어릴 적에 이 영화를 보았을 땐, 그저 '그녀'가 얼마나 4차원이고, 엽기적인 취미를 가진 사람인지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좀 달리 보인다.
'그녀'는 신발 바꿔 신기를 통해 견우가 조금은 특이한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라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녀는 그토록 행복한 웃음을 보인 게 아닐까.
이 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은 신발 바꿔 신기에서 나아가 아예 몸이 뒤바뀌었다.
남녀 주인공은 성격적으로나 계급적으로나 대척점에 서 있는데, 결코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더니, 이내 진한 사랑에 빠지고 만다. '바디 체인지'가 여기서 큰 역할을 한다. 상대방이 됨으로써 그 사람이 가지고 있을 고민,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등을 깨닫고 서로를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이 둘의 관계가 몸이 바뀌기 전까지 이루어질 수 없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드라마가 굉장히 현실적인 드라마라고 봤다.
누구의 말마따나 사랑은 어디에나 있는 거니까.
어디에서 비롯되든, 사랑을 시작하면 그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어 진다. 이것만은 확실하다.
당신은 어떤 신발을 신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신발을 신는가?
운동화 선물을 하기 위해 그의 신발 사이즈를 궁금해했던 날들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