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문라이트'가 말하는 것.
이 리뷰를 보고 바로 예매했다. 영화 ‘문라이트’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날이었다. 영화 ‘라라랜드’를 제쳤기에 더 궁금했다. 개인적으로 라라랜드는 지루하게 본 기억이 있어서, 생각 이상의 열풍에 갸우뚱했던 게 사실이다. 때문에 ‘문라이트’의 수상이 아주 조금은 속 시원했는지 모르겠다.
유사한 경험이 있다. 몇 년 전 겨울, 늦은 밤 고궁에 들렀다. 드문드문 켜진 불빛에 대체로 어두웠다. 사람들은 모두 그림자극의 인형처럼 변했다. 피부는 다 같은 검은색이었고, 눈에 쌍꺼풀이 있는지, 코가 높은지 따위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림자 뒤에 완벽히 ‘숨은’ 느낌이었다. 저 글귀를 읽고 당시의 신묘한 느낌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었을 거다.
숨은 게 아니라 스스로 숨겨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이 세상의 모든 약자. ‘나’ 안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하다. ‘나’라는 정체성이 과연 하나일까? 아니. 그것들은 조각조각 나있다. 사회의 법률적·윤리적 체를 통과한 작은 알갱이들만이 ‘드러난’ 것일 뿐, 우리 안 어딘가에 깊숙이 침전해있을 테다.
영화에서 후안은 말한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내가 되고 싶었던 사람은, 사실 내가 아니라 남이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후안은 걸음걸이가 이상한 사일로에게 수영을 가르친다. 그가 가르친 건 단순히 물에서 살아남는 ‘생존법’이 아니었다. 넓은 세상의 중심에 서는 법(In the middle of the world) 거기서 ‘나’를 잃지 않고 살아남는 법이었다.
이 영화에서 후안은 사일로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라고 봐도 무방하다. 후안은 사일로의 새로운 인생을 바라고, 사일로는 후안의 영향으로 정체성을 만든다. 역설적이게도 ‘어머니’는 장애물, 증오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미치도록 서로를 저주하고 엇갈린다. 늘 그러하듯, 사건은 그때 발생한다.
사일로 역시 그랬다. 지하철에 청소부만 남은 늦은 시각, 샤일로는 홀로 배낭을 메고 바다로 간다. 손바닥에 잡히는 보드라운 모래, 온몸을 간질이다 사라지는 바람. 파도를 따라 짜개지는 달빛. 담배 한 모금에 오가는 진솔한 이야기. 누구와 함께 있든 사랑에 빠지고 말 테다.
10년 뒤, 다시 만난 사일로와 케빈은 작은 주방에서 마주 보고 서있다. 와인 3병에 약간 취한 채.
“네가 나를 만진 유일한 사람이었어.”
샤일로의 말. 무척 섹슈얼하다. 그런데 그의 눈빛은 처연해 보였다. 그 말을 들은 케빈 눈빛 역시 마찬가지다. ‘만진다’는 것은 체온을 전하는 행위. 36.5도의 위로. 내가, 지금, 이곳에 두 발 붙이고 서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행위이다. 사회의 체에 거르고 걸려 미립자의 ‘나’만 남아 그대로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을 때. “네가 여기 있다.”라고 잡아주는 일.
그게 아니고서야 마지막 장면에서 그렇게 마음이 헛헛해질 수가 없다. 바닷가 앞에 홀로 서있는 어린 날의 샤일로. 그 뒷모습. 샤일로와 케빈이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정말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숨어있던 사일로의 공간에 문을 열고 들어온 후안과 테레사, 그리고 케빈의 이야기가 어떻게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될 수 있겠는가.
퀴어 영화를 많이 접해왔지만, 단 한 번도 ‘흑인의 퀴어’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 백인 레즈비언, 백인 게이의 사랑 이야기뿐이었다. 동성연애에 대한 편견의 폭은 낮아지고 있는데, 인종에 깔린 기본적인 이미지 자체는 더디게 변화하는 것 같아 아쉽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조차 '백인 퀴어 영화는 눈이 즐거웠는데, 흑인 퀴어 영화는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참 싸구려 같은 생각이었다.
솔직히 의문이다. 퀴어를 떠나서, 백인 한 명 나오지 않는 영화를 본 적 있던가. 기회의 문제가 아니다. 화이트 워싱 논란, GRAMMYS SO WHITE 등 각종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백인 위주 영화를 선호했다. 아니, 선호가 아니라 다른 음식은 먹을 줄도 모르는 바보처럼 굴었다. 그 탓에 흑인 자체가 낯설게 느껴졌다. 이제껏 영화에서 봤던 ‘흑인’의 모습은 총을 쥐고 있거나 총에 맞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 문라이트에서는 캐릭터가 아니라 진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내 안의 위선을 찾아주는 영화는 많지 않다.
여러 포스터 문구 중 하나로, 영화의 메시지를 가장 잘 적시했다. 영화에서 받은 여운을 어찌할 길 없어, 그림을 그려보았다. 이 그림 역시 달빛 아래 홀로 선 모든 삶에게 순간이나마 위로가 되길 바란다.
링크: https://brunch.co.kr/@delmarus/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