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잰니 Feb 28. 2017

달빛 앞에 선 외로움

영화 '문라이트'가 말하는 것.


“달빛 아래에서는 모두 푸르다.” 

이 리뷰를 보고 바로 예매했다. 영화 ‘문라이트’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날이었다. 영화 ‘라라랜드’를 제쳤기에 더 궁금했다. 개인적으로 라라랜드는 지루하게 본 기억이 있어서, 생각 이상의 열풍에 갸우뚱했던 게 사실이다. 때문에 ‘문라이트’의 수상이 아주 조금은 속 시원했는지 모르겠다. 



영화에서는  

"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 

라는 대사로 등장한다. 

유사한 경험이 있다. 몇 년 전 겨울, 늦은 밤 고궁에 들렀다. 드문드문 켜진 불빛에 대체로 어두웠다. 사람들은 모두 그림자극의 인형처럼 변했다. 피부는 다 같은 검은색이었고, 눈에 쌍꺼풀이 있는지, 코가 높은지 따위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림자 뒤에 완벽히 ‘숨은’ 느낌이었다. 저 글귀를 읽고 당시의 신묘한 느낌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었을 거다.



이 세상에는 숨어 있는 사람이 많다. 

달빛은 누구에게나 고루 내리지만, 

사회의 시선은 그렇지 않다. 

숨은 게 아니라 스스로 숨겨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이 세상의 모든 약자. ‘나’ 안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하다. ‘나’라는 정체성이 과연 하나일까? 아니. 그것들은 조각조각 나있다. 사회의 법률적·윤리적 체를 통과한 작은 알갱이들만이 ‘드러난’ 것일 뿐, 우리 안 어딘가에 깊숙이 침전해있을 테다.






“At some point you've got to decide for yourself who wanna be. 

Can't let nobody make that decision for you.”

영화에서 후안은 말한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내가 되고 싶었던 사람은, 사실 내가 아니라 남이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후안은 걸음걸이가 이상한 사일로에게 수영을 가르친다. 그가 가르친 건 단순히 물에서 살아남는 ‘생존법’이 아니었다. 넓은 세상의 중심에 서는 법(In the middle of the world) 거기서 ‘나’를 잃지 않고 살아남는 법이었다.



‘피에타’는 모성의 오랜 상징이었다. 

이 영화에서 후안은 사일로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라고 봐도 무방하다. 후안은 사일로의 새로운 인생을 바라고, 사일로는 후안의 영향으로 정체성을 만든다. 역설적이게도 ‘어머니’는 장애물, 증오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미치도록 서로를 저주하고 엇갈린다. 늘 그러하듯, 사건은 그때 발생한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이 있다고 믿는다. 

이 세상 어딜 가도 좋으니 집만큼은 가고 싶지 않은 시절.

 그런 날엔 언제나 바다. 바닷가로 가야 한다. 

사일로 역시 그랬다. 지하철에 청소부만 남은 늦은 시각, 샤일로는 홀로 배낭을 메고 바다로 간다. 손바닥에 잡히는 보드라운 모래, 온몸을 간질이다 사라지는 바람. 파도를 따라 짜개지는 달빛. 담배 한 모금에 오가는 진솔한 이야기. 누구와 함께 있든 사랑에 빠지고 말 테다.







샤일로는 그렇게 케빈과 사랑에 빠진다.

 10년 뒤, 다시 만난 사일로와 케빈은 작은 주방에서 마주 보고 서있다. 와인 3병에 약간 취한 채. 


“네가 나를 만진 유일한 사람이었어.” 



샤일로의 말. 무척 섹슈얼하다. 그런데 그의 눈빛은 처연해 보였다. 그 말을 들은 케빈 눈빛 역시 마찬가지다. ‘만진다’는 것은 체온을 전하는 행위. 36.5도의 위로. 내가, 지금, 이곳에 두 발 붙이고 서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행위이다. 사회의 체에 거르고 걸려 미립자의 ‘나’만 남아 그대로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을 때. “네가 여기 있다.”라고 잡아주는 일.



그래서 이 영화는 사랑이 아니라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다.

 그게 아니고서야 마지막 장면에서 그렇게 마음이 헛헛해질 수가 없다. 바닷가 앞에 홀로 서있는 어린 날의 샤일로. 그 뒷모습. 샤일로와 케빈이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정말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숨어있던 사일로의 공간에 문을 열고 들어온 후안과 테레사, 그리고 케빈의 이야기가 어떻게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될 수 있겠는가.






100% 흑인 배우 캐스팅. 이 영화의 또 다른 미덕이다.

 퀴어 영화를 많이 접해왔지만, 단 한 번도 ‘흑인의 퀴어’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 백인 레즈비언, 백인 게이의 사랑 이야기뿐이었다. 동성연애에 대한 편견의 폭은 낮아지고 있는데, 인종에 깔린 기본적인 이미지 자체는 더디게 변화하는 것 같아 아쉽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조차 '백인 퀴어 영화는 눈이 즐거웠는데, 흑인 퀴어 영화는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참 싸구려 같은 생각이었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 영화를 봤을까?'

솔직히 의문이다. 퀴어를 떠나서, 백인 한 명 나오지 않는 영화를 본 적 있던가. 기회의 문제가 아니다. 화이트 워싱 논란, GRAMMYS SO WHITE 등 각종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백인 위주 영화를 선호했다. 아니, 선호가 아니라 다른 음식은 먹을 줄도 모르는 바보처럼 굴었다. 그 탓에 흑인 자체가 낯설게 느껴졌다. 이제껏 영화에서 봤던 ‘흑인’의 모습은 총을 쥐고 있거나 총에 맞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 문라이트에서는 캐릭터가 아니라 진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내 안의 위선을 찾아주는 영화는 많지 않다.




“달빛 아래 홀로 선 모든 삶을 위해.” 

여러 포스터 문구 중 하나로, 영화의 메시지를 가장 잘 적시했다. 영화에서 받은 여운을 어찌할 길 없어, 그림을 그려보았다. 이 그림 역시 달빛 아래 홀로 선 모든 삶에게 순간이나마 위로가 되길 바란다.










링크: https://brunch.co.kr/@delmarus/38


매거진의 이전글 거짓말쟁이, 은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