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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잰니 Jun 13. 2022

깨달음은 우연히 온다.

이별 앞에 '버림받았다'라고 느낀 이유

지금은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10대 시절 완전히 빠져서 썼던 소설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가정에 컴퓨터 하나 있을까 말까 했기 때문에 개인 노트북은 고사하고, 우리 집 공용 PC에서 문서 비밀번호 정도 걸고 썼던 것 같다. 나는 그 소설에 꽤나 심취해서 '기승전결'의 '승'까지 썼고, 어느 정도 결말까지 정해두었다. 그러다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되는데...


"바이러스 때문에 초기화했다. 중요한 거 없었지?"


아빠... 그래, 사실 지금에야 바이러스가 고얀 녀석이지 아빠 탓할 건 못 된다 싶으면서도. 발랄한 10대 땐 그렇게 생각이 안 됐다. 내 소중한 소설인데! 다시 쓸래야 그렇게 쓸 수 없는 그것을! 왜! 허락도 안 받고 아빠 마음대로 지워버린단 말입니까? 


아빠한테 직접 따져 물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앓는 소리 한번 정도 하고 넘어갔을 터다. 대신, 며칠을 시름시름 앓았다. 소파에 누워 있다가도, 전혀 상관없는 소설책을 보다가도 이미 이 세상 것이 아닌 습작이 떠올라 괴로웠다. 특히 괴로웠던 순간은 다시 쓰려고 새 문서를 여는 순간이다. 몇 글자 채 적지도 못하고 얼굴을 파묻고 울어야 했다. 


이게 아냐, 이게 아니었어! 다시 써지지가 않아!
나는 다신 그렇게 쓰지 못할 거야. 나는 망했어...!


글쎄, 초기화하지 않았다면 해리포터 맞먹는 엄청난 소설이 세상에 소개됐을지 모르겠지만, 에픽하이의 타블로 님께서 말씀하시길, '정말 좋은 가사는 기억나는 가사'라고. 정말 엄청난 글이었다면, 새 문서 앞에서도 여지없이 그 위용을 드러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어린 날, 소중했던 글로 인해 그토록 힘겨웠던 이유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삭제당해서'였을 것이다. 완결을 내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보다 더 전에 쓰기를 멈춰버렸을 수도. 수십 년이 지난 아직까지 그 감정이 명확한 이유는 하루아침에 내가 소중하게 여긴 것이 되돌릴 수 없어졌다는 것.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였으리라.


이젠 최근이라 하기에도 무리가 있지만, 가장 최근의 이별에서 얻은 것이 여럿 있었다. 그중 해결되지 않아 전문가의 힘을 빌린 이슈도 있는데, 바로 '버림받았다는 감각'이었다. 주변 친구들에게 물었을 때 이별을 소위 당했다 하더라도 '버림받았다'는 느낌까진 들지 않는다 했다. 어떻게 그렇지? 나는 매번 그렇게 느껴왔다. 그리고 그 감각 때문에 힘겨웠다. '이번에도 어림없이 버림받았다!' 예전엔 거기서 더 나아가 '내가 문제인가? 무엇 때문이지?' 생각했고, 자학은 점점 작아져 '걔들이 문제다!'까지 왔다. 그럼에도 왜 하필 버림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심리 상담가의 도움을 받았다. 상담 선생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버림받았다는 감정이 드는 게 당연하죠." 그 50분의 상담으로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여전히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하니 답 찾기를 포기한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침대에 누워 빈둥대다 갑자기 떠올랐다. 유레카! 내가 늘 이별 앞에 버림받았다고 느낀 이유! 아래처럼 조악하게 표현해 봤다.


1) 

2) 


관계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상대에게 있었기 때문에. 내가 맺는 여러 가지 관계 중에 상대가 떨어져 나간 게 아니라, 그가 맺는 여러 가지 관계 중에 나를 삭제했다는 것에 초점 맞췄기 때문에 괴로웠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1)에서 삭제당한 나는 너무 외로워 보인다. 하지만 2)에서 보이는 나에게는 아직 남은 것들이 한참 많아 보인다. 나는 2)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1)로 생각했기 때문에, 미련 없이 나를 삭제하고 휴지통 비우기까지 해 버린 그가 미웠던 것 같다. 하지만 우연히 다운로드한 파일 중 하나는 내가 아니라 상대였음을. 그러니까 바이러스든 뭐든 알아서 삭제된 파일 하나 가지고-물론 용량도 크고, 엄청난 결말을 쓰리라고 고대해온 소설이라 할지라도-'버림받았다'라고 생각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걸. 그냥 그렇게 갑자기 알게 됐다.


10대 시절 소설을 날렸던 것처럼, 당황스럽고 적응 안 되고, 이따금 '백업해둘 것을!' 하고 생각도 나겠지만 시간 지나면 그런 파일이 있었나? 싶게 알아서 잊힐 터. 타블로 선생님의 말씀을 새로이 되새긴다. '정말 좋은 사람은 내 옆에 남은 사람' 내게는 앞으로도 저장할 데이터가 많고 열어 봐야 할 폴더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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