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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잰니 Jun 08. 2022

퇴근하고 만난 수달

바닷가 마을에서 재택근무를 하면 벌어지는 일

내 본가는 바닷가 마을이다. 작은 동네지만 때마다 객들이 찾아와 붐비기도 한다. 나는 아주 어려서 한 해, 조금 더 커서 5년 반 정도를 보냈다. 고향이라 부르기도, 그렇다고 고향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곳. 내면, 그러니까 내 '안'을 구성하는 것의 80% 이상은 그곳에서 자라났다. 웃음보다는 눈물을 더 많이 겹쳐 본 곳이지만, 여전히 애틋한 나의 마을.


연휴를 맞아 본가에 갔다. 재택근무 중이라 연휴 전 이틀은 본가에서 일했다. 아침 8시. 알람 대신 어머니 성화로 잠에서 깨 겨우 눈을 비비고 노트북을 켰다. 한 시간 남짓 일했을까, 꼬르륵 소리에 냉장고에서 방울토마토를 꺼내 까드득 까드득 먹으며 마저 업무를 본다.


12시. 점심시간. 엄마, 아빠 오붓하게 둘러앉아 갖가지 반찬을 집어 든다. 혼자서는 무조건 '원(1) 메뉴'라 숟가락이나 젓가락 하나만 필요했는데. 찌개도 떠밀었다가 반찬 종류도 골고루 집어 든다. 그렇지 않으면 금세 "나물도 먹어 봐. 맛있다." '스윗'한 속내에 그렇지 않은 어투의 불호령이 떨어지니까.


점심시간은 아직 30분 정도 남았다. 하루는 엄마와, 하루는 아빠와 근처 편의점에 갔다. 요즘 부모님이 단단히 빠졌다는 피스타치오 맛 아이스크림을 2+1에 사고, 나를 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산다. 근처엔 흔한 체인점 카페 하나 없다.


퇴근시간이 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엄마 아빠 돌아가면서 한 번씩 묻는다. 아직도 하냐고. 일 열심히 하네, 안 쉬고. 칭찬인지 감탄인지. 그렇게 일하다 보면 어느덧 5시. 급한 일들을 마무리하고 동료들에게 메신저로 인사를 건네고 노트북을 덮는다.




"해안도로 산책 갈래?"

얼른 아빠가 다가와 묻는다. 외출을 그리 반기지 않는 분인데. 퇴근하면 혼자라도 걸어서 바다 보러 갈까 싶다고 한 말을 기억하신 모양이었다. 나는 망설이는 체일랑 조금도 하지 않고 그대로 "네!!" 외쳤다. 아빠는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입고 자동차 열쇠를 챙겼다. 나는 청바지에 흰 티를 입었다. 아빠는 오늘 날씨가 제법 차다며 위에 하나 더 입으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본가에 내 옷이 있을 리가? "그럼 내 셔츠라도 꺼내 입어라." 평상시에도 체크 셔츠를 좋아해 아빠 셔츠를 탐내던 나였다. 그렇게 추위가 허락해 준, 보이프렌드 룩 아니고 '대디 룩(DADDY LOOK)'이 완성됐다.


자동차로 5~10분쯤 달리다 보면 바닷가를 끼고 산책 코스가 나온다. 평일 오후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 주차를 마쳤는데도 아빠가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갔다 와." 그러면서 집에서 챙겨 온 소설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오히려 반가웠다. 혼자 감상에 젖어 음악 들으며 걷고 싶었기 때문에.


모래사장 앞 주차장에서 나 홀로 독서를 시작한 아빠를 두고 산책을 시작했다. 태양이 서서히 저물어 산의 겉면에 황금빛 테두리가 생겼다. 혼자 걷는 사람,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낚시꾼, 자전거 타는 사람.. 나는 그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바다와 도로 사이, 높은 턱 위로 올라가 걸었다. '강구 벌레'라고 부르는 갯강구가 재빠르게 자기 갈 길을 갔다. 나는 그들 뜻을 존중하려 최대한 먼 곳에서 조심히 발을 내뻗었다.



유람선  대가 지나가 파도가 크게 일렁이는  보면서 가만가만 걷는데, 바다 한가운데 뾰족한 무언가가  번을 빼꼼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물고기 같기도 하고, 얼핏 고래 얼굴 같기도 했다. 저게 뭐람...? 그렇게  거리도 아닌데, 파도에 가려  보이지 않아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확대해서 동영상을 찍는데, 괴생명체(?)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둥그런   개가 포착됐다. "?!" 수달이었다. 깨닫자마자 달은 앞구르기 하면서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세상에, 수달을 보다니! 그것도 아쿠아리움 따위에서가 아니라 동네 산책에서! 몇 마리 더 볼 수 있을까 해서 계속해서 바다를 응시했지만, 더 이상 나타나 주지 않았다. 동네 낚시꾼들은 자주 보려나? 사실 처음엔 바다니까 단순히 해달이라고 생각했다. 검색해보기 전까지는. 민물에 사는 수달이 요즘 남쪽 바다에 대거 출몰하고 있단다. 그 친구들은 주로 선착장에 나타나 이미 포획을 마친 물고기들을 포획한단다. 천적이 없어 개체 수가 늘어나고만 있어 어민들의 골칫덩이라고. 해달인 줄 알았을 땐 귀엽기만 했는데, 사실을 알고 나니 조금 더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수달과의 조우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아빠는 조수석 의자를 젖혀놓고 한창 독서 삼매경. "벌써 왔나?" "아빠, 저 사진 찍어주세요." 억지로 아빠를 끌어내 결국 사진 두어 장을 남긴다. 아빠는 여느 또래 친구들보다 더 잘 찍어주셨다.





아빠는 차에 책을 두고 왔다며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나도 전날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독서를 이어갔다. 7시가 더 넘어가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아빠라도 차려 드릴까 여쭤봐도 사양하셨다. 냉장고를 구경하다 즉석으로 오믈렛을 만들고 싶어 요리를 시작했다. 아빠는 책을 덮고, 내가 요리하는 내내 냉장고 옆에 서서 말을 붙였다. 사실상 내 대답은 필요치 않은, 넋두리에 가까운 이야기. 우리 가족과 가족의 가족의 최근 10여 년의 역사에 대해 짧게 요약하곤 코멘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밥상이 완성되어서야 겨우 라이브로 듣는 우리 가족 버전 <토지>가 끝났다.


장단점이 있는 재택근무지만, 그 어떤 때보다 재택근무에 감사했던 날의 기록이다. 일을 아예 안 할 순 없으니까, 한 한 달 정도라도 본가에 머무르며 재택근무하면 좋겠다. 그럼 오전에는 시장도 같이 가고, 점심시간에 동네 산에 올라 절도 방문할 텐데. 가족과 함께 하는 식사는 말할 것도 없고. 넋두리가 피처링되긴 했지만, 퇴근 후 함께 한 소소한 일상이 모처럼의 치유가 된 나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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