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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범 Apr 05. 2022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타인의 삶 #4 - 개인을 정의한다는 것은

지난 10일간 나는 히틀러가 먹는 음식의 시식가였다. 20세기 중반을 살아가던 젊은 여인이었고, 전쟁의 피해자이자 수혜자였다. 나는 로자 자우어였다.


이렇게까지 깊이 빠진 채로 책을 읽어본 적은 지난해 여름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예전에 독일 여행을 다니며 페이스북에 여행기록을 남길 때, 우연에서 오는 만남은 기쁨을 배가시켜준다는 문장을 적은 적이 있었다. 그것도 이제 보니 꽤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 생애 처음으로 구입한 e북 리더기를 통해 가장 먼저 어떤 책을 읽어 볼까 하며 도서목록을 쭉 훑어보다, 이런 책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나의 눈에 이 책의 제목이 들어왔다. 그렇게 우리 둘은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제목에서 어느 정도 흥미를 느끼긴 했으나, 처음엔 단순히 앞의 몇 장만 훑어보려고 했었다. 쪽수도 꽤 많은 장편소설이기에. 하지만 그 몇 장이 어느새 열 장이 되고, 순식간에 스무 장, 서른 장이 되어 갔다. 흥미로운 책을 우연히 만났다는 기쁨이 책을 읽는 동안 점점 커져 갔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 이 소설의 번역체였다. 가장 최근에 읽었던 소설은 지난겨울의 아담과 에블린, 잉고 슐체 작가의 장편소설이었다. 그 책은 학부생으로서의 마지막 학기에 들었던 한 강의 때문에 읽게 되었었는데, 완독하는 데에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번역체 때문이었다. 외국어 학습자로서 번역가들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들을 존경하나, 독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그것은 좀 다르다. 어떻게까지 표현을 할 수 있을지 조심스러우나, 읽는 내내 역자 특유의 번역체가 답답함을 불러일으켜 나로 하여금 빨리 독일에 가서 원문으로 재독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하게 만들었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내게는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번역체 덕분에, 단순히 책장을 넘기는 재미로 읽어나가는 게 아니라 이야기에 푹 빠져서 몰두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물론 번역체 이전에 책의 내용 자체가 흥미로운 게 우선이긴 하다.


인상 깊은 구절이나 장면들은 글의 맨 밑에 쪽수를 표시해 적어두었다. 장편소설인만큼 생각할 거리가 가득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내 머릿속에 맴돌던 의문이 하나 있다.


2차 대전에 관심이 있거나 공부를 해 본 사람들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여러 번 들어봤을 것이다. 이 주제가 언급되고 내용이 어느 정도 깊어지면 '베르사유 조약'이라든가 '홀로코스트' 등과 함께 빠짐없이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나 또한 2차 대전이라는 주제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도출해 낸 중요한 포인트라 생각한다. 문제는 과연 악의 평범성이라는 건 어디까지 해당될까 하는 것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이 개념에 가장 잘 들어맞는 건 '치글러 중위'이다. 그는 나치의 장교로 복무하면서도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스스로 사유하지 않는다는 걸 함께 짧은 외도를 했던 주인공 로자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로자의 남편 그레고어는 어떨까? 그는 전쟁 발발 후 군에 자원입대를 한다. 조국을 지키는 데에 가담하기 위한 자발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자에게 이따금씩 보내오는 편지들을 통해 그의 그러한 결정을 이끌었던,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어떠한 확신에 금이 가고 있다는 것을 소설은 보여준다. 그렇게 그레고어는 크리스마스에 휴가를 나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실종되고, 큰 부상을 입은 몸을 이끌고 조국 독일로 돌아온다.


주인공인 로자를 생각해 보자. 로자는 몇 안 되는 히틀러의 시식가로 선발되어 매일 세 번의 끼니를 목 뒤로 넘기며 죽음과 마주한다. 독재자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피해자로서 매일마다 음식을 먹으며 죽을 걱정을 하게 되지만, 동시에 식량을 구하기 어려운 전쟁통에 매 끼니마다 훌륭한 식사를 먹을 수 있게 된 수혜자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론 비자발적이나 아무튼 나치에 가담을 했고, 남편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에는 나치 장교인 치글러 중위와 유부녀와 유부남으로서 외도를 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과 정의는 명확하다. 하지만 이것을 어떤 개인에게 마치 프레임처럼 씌우려고 하면, 개인이라는 존재들은 너무나 복잡해서 마치 상품을 포장하는 것 마냥 그렇게 매끄럽게 씌워지지는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로자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속으로 나치를 지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 봤을 때 그녀는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나치에 가담한 이력이 있으며 심지어 혜택을 보기도 했다. 한편으로 매 끼니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좋든 싫든 음식을 입 속에 집어넣어야 했다. 그녀에게 자유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나치 장교와 불륜 로맨스를 쓰기도 했다. 그녀는 그리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시민 신분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악이었을까?

로자의 남편 그레고어는 편지를 통해 전쟁의 실상이 본인이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인지했음을 밝혔다. 그는 자원입대를 할 때까지만 해도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에 부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입대를 하고 어느 부대의 소속 병사가 된 이후에 이러한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는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 그에게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자유는 존재했을까?


무엇이 어떻든 간에, 악에 가담했다는 이력은 지워지지 않는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에 완전히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들었던 학문적인 의문을 다만 몇 자 적어 보았다.



*쪽수는 크레마 카르타G 기준

25p. 내 몸은 총통의 음식을 흡수했다. 이제 총통의 음식은 피를 타고 내 몸속에서 순환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무사했고 나는 또다시 배가 고팠다.


160p. 통보서에는 나이 34세, 키 182센티미터, 몸무게 75킬로그램, 가슴둘레 101센티미터, 금발에 눈동자가 옅은 푸른색이고 정상적인 코와 턱과 건강한 치아의 소유자이자 엔지니어인 그레고어 자우어가 실종됐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실종. 그레고어 자우어라는 이름의 남자는 종아리가 가늘고, 만이라도 있는 것처럼 엄지발가락과 검지 발가락 사이가 벌어져 있고, 신발창이 항상 안쪽부터 닳고, 음악을 좋아했지만 콧노래는 절대 부르지 않았다는 내용은 통보서에 없었다. 통보서에는, 평화롭던 시절 그가 하루도 빠짐없이 면도를 했다는 내용도 없었다.


178p. 인간은 살아 있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을 멈출 수도 있다. (중략) 나는 반항하기로 했다. 친위대원들이 아니라 내 인생에 반기를 들기로 했다. 그날 나는 나를 크라우젠도르프에 있는 제3제국의 식당으로 이송하는 버스 안에 앉아서 존재하는 것을 멈췄다.


383p. 잠은 사람을 현혹시킨다. 얼마나 많은 이가 다시 눈을 뜨리라 자신하며 눈을 감았다가 잠들고 말았던가. 잠은 죽음과 너무나 비슷하기에 믿을 게 못 된다.


539p. 뮌헨에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지만 베를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포화 속에서 내 몸뚱이 하나 편히 뉠 곳 없이 나는 홀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런 내 삶의 하찮음에 나는 마음이 상했다. 그런 삶을 지키기 위해 뭐 하러 아등바등해야 한단 말인가. 살아남는 게 무슨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대체 누구에 대한 의무란 말인가.


그리고 612p. 와 613-614p.

이 장편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한 어쩌면 소박하고 일상적인 두 장면들에 나는 감탄을 했다. 완벽한 마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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