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라고 이름 붙인 회피는 아닐까..
화장실에 가려고 눈을 떴다가 집 안이 유난히 조용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둠 속에서 가습기만 규칙적으로 숨을 쉬고 있었고,
자고 있어야 할 남편이라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다.
한참 뒤에야 연결된 태연한 목소리
“지금 택시야 거의 도착했어"
주말도 아닌 월요일,
새벽 두 시에 가까운 귀가.
스무 해가 넘는 결혼생활 동안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장면이다.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무뎠던 건 아니다.
신혼 시절에는 화도 냈고,
붙잡아 말해보기도 했고,
때로는 눈물로 설득하려 한 적도 있었다.
말을 하면, 싸우더라도
조금씩은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던 중
마음의 지옥속에서 살던 나날들속에
나는 법륜스님의 말을 마음에 새기며 해법을 찾았다.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고 내 마음을 바꾸라.”
“기대가 괴로움을 만든다.”
그 말은 분명 맞았다. 실제로 나는 편해졌다.
상대가 변하지 않아도 내가 덜 화내면 되었고,
기대를 내려놓으면 실망도 줄어들었다.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는 그 선택이 더욱 분명해졌다.
부부가 다투면
아이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고,
관계가 흔들릴수록
아이의 정서가 먼저 걱정되었다.
그래서 나는
잔소리를 줄였고, 지적을 삼켰고, 요구를 접었다.
그때 나는 그것을 ‘포기’라고 부르지 않았다.
‘수행’이었고,
‘지혜’였고,
‘어른스러움’이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니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고,
집은 실제로 평화롭고 조용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조용해진 것은
집만이 아니었다.
나도 함께 조용해지고 있었다.
회피와 포기는 생각보다 소리가 없다.
관계를 한 번에 무너뜨리지도 않는다.
다만 질문을 하나씩 없앤다.
왜 늦는지 묻지 않게 되고,
왜 연락이 없는지 궁금해하지 않게 되고,
왜 늘 내가 기다리는 사람인지 생각하지 않게 된다.
어젯밤에도
같은 갈림길 앞에 섰다.
지적을 해야 할까.
말을 꺼내야 할까.
하지만 마음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변화의 가능성이 아니라 다툼의 장면이었다.
서로 지치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채
며칠을 불편하게 보내는 나 자신.
그래서 나는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선택이 옳아서가 아니라, 다른 선택이 더 괴로웠기 때문이다.
법륜스님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상대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괴로운 건 나다.”
그 말은 여전히 맞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이 나를 완전히 편안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내가 해온 포기는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
싸우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고,
아이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고,
나를 덜 소모시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포기는 나를 보호하는 동시에
조금씩 나를 지워온 것 같다.
불편함을 느끼는 나,
요구하는 나,
변화를 기대하는 나.
그렇게 하나씩 내려놓고 나니 이제 마지막 질문만 남았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사는 것이 정답인가..
상대를 포기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을 할 수는 없는 걸까.
상대를 바꾸려는 말이 아니라,
나를 더 이상 지우지 않기 위한 말은 가능한 걸까.
아직 답은 없다.
다만 분명한 건 나는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평화’가
마냥 편안하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이 나이에,
이 상황에서
이 질문 앞에 다시 서 있다는 것이
조금은 슬프다.
하지만
아마도 이 질문은
끝이 아니라
다음 선택의 새로운 시작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