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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실을 잠그고 받은 뜻밖의 보상

축제에 빠져들다..

by 정은


수요일, 학교 축제 날.
내 이름 옆에 붙은 공식 역할은

‘응급환자 대비 비상대기조’였다.
축제의 흥과는 먼 역할이다. 게다가 원래 계획은 체육관 앞에서 대기하는 것이었다.

찬바람 맞으며,

언제 울릴지 모르는 호출을 기다리는 자리.

한숨이 나왔지만, 그래도 나름 프로답게

비상약, 붕대, 소독제, 얼음팩까지 카트에 착착 챙겨

체육관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때, 구세주처럼 교감선생님이 등장하셨다.


“여기 너무 춥지 않아요? 안으로 들어가 계세요.”

이 말 한마디가 이렇게 반가울 수 있을까.
체육관 안, 그것도 무대가 훤히 보이는

자리가 순식간에 마련됐다.
보건실 단골이자 학생회 임원인 아이가

어디선가 의자를 세 개나 구해와 능숙하게 배치했다.
‘얘가 이런 능력도 있었네’ 싶었다.


따뜻했다.
게다가 편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연이 너무 잘 보이는 명당이었다.



고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축제를

꽤 여러 번 겪어봤지만,
제대로 본 적은 거의 없다.
보건실은 축제 날이면 묘하게 ‘쉼터’가 된다.
아프지 않아도 아픈 척,
공연보다 침대가 좋은 아이들이 꼭 생긴다.
그 아이들 때문에 나는 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보건실은 잠그고, 행사장에 와서 대기해 주세요.”
이건 거의 초대장이었다.
잠깐 고민을 했지만, 이 좋은 기회를

내 발로 걷어찰 이유가 전혀 없다.
‘오예! 가자! 나도 가서 축제 좀 즐겨보자!.’


댄스팀 공연이 시작되고 박수를 치며 즐기고 있는데,

정말로 눈에 띄게 잘 추는 여학생이 있었다.

어머나! 자세히 보니 보건실에 정말정말

자주 오던 여학생이 아닌가!

발목이 아프다, 무릎이 욱신거린다, 골반이 뻐근하다,

허리가 안 좋다… 올 때마다

“춤 좀 살살 춰라”라고 잔소리를 했던 그 아이였다.

흔히 춤선이 예술이라고 표현하는데,

정확한 동작에, 에너지는 넘쳤고,

표정은 완전히 전문 댄서 같았다.
타고난 댄스 머신이 춤이 너무 좋아서

자기 몸을 끝까지 쓰면서 춤을 추니

몸이 늘 아팠던 것이다.
다음부터 보건실 오면

잔소리는 접어두고 열심히 치료해 줘야겠다.


배구부 에이스인 남학생도 그랬다.
점심시간에 보건실에 들러서

자기 댄스공연한다고 꼭 보러 오라고 해서

알았다고 대답은 하면서도 속으론

'배구하는 애니까 춤까지 막 그렇게 잘 추진 않겠지?" 했었다.

그런데 춤을 추는 순간 그 생각이 완전히 깨졌다.

리듬감도 좋고, 표현도 좋고, 무엇보다 자신감이 있었다.
아이들은 참, 내가 보는 것보다 훨씬 입체적인 존재였다.



중간에는 교사 밴드 공연이 이어졌다.
아… 진짜 멋있었다.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사실 나도 노래를 좀 한다.
고등학교 때는 중창단으로 활동도 했다.
잠시, 정말 잠시
‘나도 저기 서볼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새로운 관계, 새로운 모임, 새로운 에너지.
예전엔 설렜는데, 지금은 조심스러운 마음이 더 크다.
그것도 나의 변화이고, 나의 선택이다.


3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나는 오랜만에 ‘보건실의 사람’이 아니라
‘축제를 함께 즐기는 어른’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아이들의 함성, 떨리는 목소리,

땀에 젖은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며
외로운 직무라 느껴질 때가 많았던 보건교사의 자리가
이날만큼은 충분히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ChatGPT Image 2025년 12월 26일 오후 01_53_50.png

그러다 웃지 못할(?) 사건도 생겼다.
내가 너무 신나게 박수를 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까
체육 선생님 한 분이

“내년부터는 보건샘, 보건실 지키는 쪽으로 건의해야겠어요.”

하는 게 아닌가.


“왜요?” 하고 물었더니
“오늘이 일 년 중 제일 즐거워 보여서 배가 너무 아파서요. 하하하”


맞는 말이었다.

축제는 아이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날만큼은, 나에게도 충분히 너무나 즐거운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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