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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Mar 10. 2023

호구선생님 5

세상은 나의 의지를 읽는다.  그 의지를 바탕으로 일은 진행된다.

평소에 나는 문제해결 의지가 강한 사람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저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사는 것을 좋아한다. 무슨 일이 닥쳤을 때 묻고 따지고 결판을 내기보다는

감수하고, 협의하고 넘어가는 쪽을 택한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단죄보다는 용서라고 생각해 왔으며, 가급적 친절함을 모토로 삼는다.  나긋나긋하고 여유 있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그런 내가 지금은 전사가 되어있다.

나를 겨냥했든 그렇지 않든 절대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 일어났고, 나는 그것을 수습해야만 한다.


그냥 못 본 척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처음 액체를 보았을 때 소독약이 샜나? 했었다. 설마 하고 냄새를 맡았을 때 확신했고, 침대시트를 끌어올려 형체까지 확인했을 때 충격을 받았다. 순간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엄청난 갈등과 불안과 혼란함이 몰려왔다.


갈등

못 본 척할까? 그냥 묻어버릴까?

절대 그럴 수 없다. 이 아이는 보건실에서 배출을 했다. 나와 단둘이 있었던 공간이었고, 경위야 어찌 되었든 고2가 그 정도로 사리분별을 못하는 정도의 성충동을 가졌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또 이대로 넘어간다면 친구들과 공유될 것이다.  요주의 무리에 속한 학생이며 그냥 넘기기엔 사안이 너무 중하다.


불안

커튼 안에서 무엇을 했던 것이냐. 나를 타깃으로 삼았던 것이냐? 영상을 봤던 것이냐? 내가 혹시라도 발견하지 못했었다면 지속되었겠지? 혹시 처음이 아니었던 건 아닐까? 혹시 혼자서 배출하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무섭고 불안하다. 다른 학생들도 그런 상상들을 하고 있을까? 앞으로 남학생들을 어떻게 침상안정을 시킬 수 있을까? 


혼란함

나의 친절이 이 아이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켰을까? 여기저기서 혼나는 아이들, 그저 숨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이 아이들에게 그저 여기는 별 터치 안 하는 호구샘이 있는 곳이었을까?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학생들을 대하고, 보건실 운영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장과 담임을 불러 확인시켰을 때 나의 충격만큼 그들도 충격을 받았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저 한 아이의 실수정도로 보는 것 같다. 나의 표면적인 태도나 말들이 약했던 것이다. 교감에게 바로 얘기하길 잘했다. 

즉각적으로 일처리가 진행이 되었다. 

나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절대 해서는 안될 행동을 한 학생은 반드시 단죄하겠다.

그래야 이번일이 학생들 사이에서 공유되지 않을 것이다. 혹시 공유되더라도 학생이 받은 단죄까지 공유됨으써 어떤 결과가 따르는지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될 것이다.


내가 학생부와 학생부장에게 격앙된 모습을 여러 번 보였다.

그들의 의지가 별로 없음을 느꼈으므로.  그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 있다. 학생 본인이 발뺌을 하고 있고, 추궁을 하기에도 성적인 발언들이 많아 그 과정 중에 역으로 공격당할 수 있는 곤란한 입장임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도 학생을 특정할 수 없다는 등의 말은 접수부터 안 하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특정할 수 없다니. 단 한 명이 누웠다 간 침대에 그 학생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발견되었고, 본인도 자기가 눕기 전엔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았다고 했잖아. 

"아 네 그래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특정할 수 없으니 그냥 멈춰야 하나요?"

평소의 내 말투대로 나긋나긋하게 나갔다면? 이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사안이 방학을 앞두고 안타깝고 분노스럽지만 그냥 멈춰져서 진짜 저희도 속상하고 열받네요 로 아름답게 덮어질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같은 동료에게 분노했고 

"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위원회까지 가겠다. 학생을 계속 압박하겠다. 가해자로 세울 수 없으면 관련학생으로라도 진행시켜 달라. " 

 강력한 의지를 전달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라는 의미는 교육청에 내가 직접 접수하겠다는 무언의 압박이 내포되어 있다. 정액 반응검사 시약도 내가 찾아냈다. 그들에게 내 의지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사안처리의 방식까지 전달하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증명하겠다는 의지를 계속 전달한다. 너희가 미온적으로 대한다면 나는 이 과정까지도 문제 삼을 수 있다는 무언의 압력을 계속 전달한다. 그러나 동료이기 때문에 고맙다는 인사도 계속한다. 난 그들이 고맙지 밉거나 서운하지는 않다. 하지만 일이 해결되게 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움직여야 한다. 나의 의지를 계속 전달해야 한다.  시약 동영상을 촬영하기 전 학생의 진술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객관적인 자료를 찾았고, 해당부서에 전달했다. 또 나의 변함없는 의지를 전달한 것이다.


나는 이제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아 뭐 이 정도로,  본인이 부인하니까,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므로,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 것은 아니므로... 등등

선처로 마무리될 수 있다. 그래! 나는 결정권한이 없으므로 그런 결과가 나오더라도 수긍하겠다. 그러나 학년부에 해당학생이 보건실 출입은 못하도록 요청하겠다. 그리고 나는 내가 받은 피해를 복구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므로 트라우마를 겪게 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을 대할 때 예전처럼 무조건적 긍정적 수용은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 선을 지키며 따뜻하고 교육적인 선생님으로 성장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안이 중하여, 피해교사의 정신적 피해정도가 커서, 학생의 성충동장애의 정도가 심해서 교육적 차원에서의 징계가 내려진다면, 그것 또한 내가 원하는 방향이며, 이 또한 나에게 트라우마를 남기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 사이에서 공유되어 보건실이 해소의 공간으로 전락하지 않을 것이다. 위원회까지 갔다는 그 자체로도 행위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경각심을 주기엔 충분할 것이다. 


나의 의지, 나의 의지, 나의 의지는 나를 움직일 뿐만 아니라 그 의지를 읽은 상대방의 심리를 움직이고, 그 심리는 행동을 불러온다. 나의 의지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며, 그 사람들의 마음과 태도롤 불러온다. 해결의 결과 또한 나의 강력한 의지대로 결정될 수 있지만 설령 나의 의지와 반대로, 또는 내 의지에는 못 미치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나는 나의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으므로 트라우마로 남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트라우마로 남는다는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이 움직이고, 그 상황이 나를 계속 힘들게 하며 괴롭히는 것이리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은 언제나 벌어질 수 있지만, 그 벌어진 상황이 나를 계속 힘들게 하며 괴롭히지 않게 하는 것은 나의 의지에 달려있다.


나는 나를 스스로 지킨다. 나는 나의 세상을 스스로 만든다. 

그 어떤 상황도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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