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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Nov 29. 2022

호구 선생님1

아이들하고 얘기도 잘 통하고 좋은 선생님 같지?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천사 샘, 친절한 선생님, 말투가 몽글몽글해서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세심하게 치료해주시고, 나중에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까지 자세하게 알려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보건실 갈 때마다 기분이 좋아요.


매년 교원평가는 나에게 좋은 기분을 선사한다.  간혹 나쁜 평가도 끼어있긴 했지만  그것은 모두의 마음에 들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하며 상처받지 않는다.   교원평가를 보고 힘들어하는 동료 교사를 볼 땐 속으로 은근히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학생들과의 관계도 원만히 잘 맺고, 가끔 그들의 깊은 이야기도 성의껏 들어주는 나 같은 좋은 교사가 되려면 너도 좀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어? 맨날 불만 가득한 얼굴에, 투덜투덜 대니 학생들 눈에 그게 안 보이냐고. 쫌 잘해라 쫌.


소년심판을 보았다.

후배 판사(김무열)는 보호소 출신의 소년범들을 살뜰히 챙긴다. 할머니 약값을 빌려주기도 하고, 검정고시 책을 선물하기도 하고, 아이들의 개인적인 부분까지도 잘 헤쳐나가고 있는지 질문하고, 챙긴다. 그 살뜰한 판사와 밥을 먹는 자리에서 이제 갓 보호조치가 끝난 소년범은 버젓이 빈 좌석의 지갑을 훔친다. 그리고 앳되고 착한 얼굴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범행 장면을 목격한 선배 판사(김혜수)에 의해 절도가 발각되고 만다.

"그래도 판사님! 사람들 있는 앞에서 아이의 범행을 드러내신 건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아이들도 인격이 있고, 인권이 있다고요."


"아이들하고 얘기도 잘 통하고, 개인적인 부분도 챙기니까 좋은 어른 같지? 그런데..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하.. 나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물음 같아서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스스로 좋은 선생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이들도 나를 그렇게 생각했을까?

아닌 것 같다. 나는 그저 호구 선생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친근감을 표시하게 위해 헤헤 거리는 선생님.

화낸 후의 뒷감당이 불편해서 친절의 가면을 쓴 채로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방관하고, 지도를 포기한 선생님!


그날도 어김없이 명석이는 후드를 푹 눌러쓰고 찾아왔다. 두통이 심해 6교시에 보건실에서 쉬고 싶다고 했다.

여타의 보건실 단골환자들과 명석이는 좀 다르다. 자주 찾아오지만 누워서 쉬게 해 달라거나 약이 듣지 않으니 약을 더 달라거나, 또는 친구들과 히히덕거리며 떠들지 않는다. 그저 후드티를 푹 눌러쓴 채로 순서를 조용히 기다리다가, 두통을 호소하고, 약을 받아갔다. 웃는 낯도 별로 보지 못했다. 학교에서 유명한 말썽꾸러기 아이들 무리에 속해 있지만 그 아이들과는 약간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항상 까불거리고, 몇 분이라도 늦게 수업에 들어가려고 보건실에서 뭉기적 거리다가 확인증을 받아가곤 하는 그 무리의 아이들이 하는 행동을 명석이는 별로 하지 않았다. 그저 두통이 잦은 우울해 보이는 아이였다.  사람을 바라볼 때 눈을 잘 마주치지 않았고, 쳐다보더라도 정면으로 자연스럽게 쳐다보는 것이 아닌, 힐끗 곁눈질로 쳐다보는 약간은 침울하고, 분위기가 어두운 그런 아이였다.


  1학기 2차 지필고사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열흘 전이었다. 생기부를 화려하게 채우기 위한  자율교육과정이 시작되었다. 진로 관련 교내 행사가 하루 종일 열리고 학생들은 본인이 원하는 진로행사에 참여해서 결과물을 만들어 제출하면, 그것을 참고해서 생기부가 채워진다. 요양 확인서에 담임교사의 사인을 받아온 명석이를 두 번째 침대에 눕혔다.  하루 종일 머리 아프게 공부를 해야 하지 않아서 인지 자율교육과정이 시작되자 보건실 환자수가 급격히 줄었다. 나도 마침 오늘부터 내일까지 결핵검사를 실시해야 했기에 명단 정리와 나이스 입력 등 정리할 일들이 많았다. 명석이를 눕히고, 커튼을 쳐주고, 나는 책상에 앉아 결핵검사 명단 정리를 했다.


' 내일은 오늘 못한 3학년 학생과, 교직원, 그리고 2학년 학생들을 모두 완료시켜야 한다. 각 반 담임에서 미완료자 메시지도 보내고, 금액도 다시 맞춰보고.... '

  명석이가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잠을 한숨 자면 두통도 더 좋아질 텐데, 저놈의 핸드폰이 늘 문제다. 보건실에 쉬러 오는 학생들 중 기껏 누워서 한다는 짓이 수면 대신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 가는 놈들이 많다. 학생인권이니 뭐니 해서 핸드폰 수거도 못하게 하니, 어쩌면 저 아이들은 아플 때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게 아닐까 한편으론 안타깝기도 하다. 

'  잡스 개쌔끼! 세상 모든 애들에게 스마트폰을 쥐어주고 시스템적으로 우민화를 시켜놓고, 정작 지 애들은 스마트폰을 늦게 쥐어줬다며?'

 핸드폰에 빠져있는 아이들을 볼 때면 나는 늘 잡스 개쌔끼로 생각이 마무리된다. 명석이는 휴식하는 50분 동안 계속 뒤척거리는 소리를 냈다. 

"명석이 종 쳤네! 이제 일어나서 올라가야겠는데?"

"네."

"이제 좀 괜찮니? 확인증 여깄어. 담임선생님 드리세요."

명석이는 곧바로 침대에서 나왔고, 나는 보건실에서 1시간 휴식했다는 확인증을 적어주었다. 그런데 명석이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는 것 같다. 살짝 웃는 것 같기도 하고, 평상시의 침울한 모습과는 미묘하게 다른 모습이다. 뭐 뒤척거리긴 했지만 잘 쉬어서 좋아졌나 보다. 


아이들이 누웠다 간 침대는 소독약을 한 번씩 뿌린다. 패브리즈를 뿌리기도 하고, 알코올과 물 그리고 에센셜 오일을 일정 비율로 섞어서 손수 만든 천연소독제로 소독을 하기도 한다. 아침부터 바빠서 우울했던 나의 기분전환을 위해 스위트 오렌지향을 집어 들고 명석이가 누웠던 침대의 이불을 걷었다. 

"어? 이게 뭐지?"

  침대 한쪽 귀퉁이에 액체가 흥건하다. 아직 내 손엔 스위트 오렌지향 소독약이 들려있고, 아직 뿌리지도 않았고, 침대에 내려놓지도 않았다. 명석이가 물을 쏟았었나? 젖어있는 매트 패드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순간 강한 정액 냄새가 콧속으로 훅 들어오며, 내 정신까지 흔들어 놓는다. 

"설마!"

덜덜덜 떨리는 손과 정신을 가다듬으며 매트 패드 밑의 매트리스 커버를 끌어당겼다.  하얗고 불투명한 정액의 형상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명석이가  누웠던 침대에서 발견된 정액은 매트를 직각으로 감싸는 매트리스 커버의 모서리 부분에 묻어있어 곧바로 스며들지 못하고 흐르는 듯이 그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정액의 형상을 확인하자 냄새가 더 심하게 나는 것 같다. 매트리스 커버와, 그 위의 매트 패드, 그리고 이불에 까지 정액이 골고루 묻어있는 것을 다시 확인하니 손과 심장이 더욱더 덜덜덜 떨린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저건 정액이 맞아!  이 침대는 명석이가 최초로 사용한 것이고, 정액이 아직도 액체 상태인 것으로 보아 나가기 바로 직전까지도 배출한 것일 수 있어. 게다가 더 끔찍한 건 1시간 동안 보건실에서는 명석이와 나밖에 없었어. 비록 커튼으로 공간이 나뉘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커튼을 걷으면 그냥 한 공간인 곳, 그것도 학교, 그것도 여교사와 단 둘이 있었던 공공장소에 정액을 남겨놓고 간 18살의 남학생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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