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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Dec 13. 2020

눈이 오면 세숫대야를 준비하세요.

필수품 이니까요.

'딩동' 

'밖에 봐 봐. 눈 와. 그것도 아주 펑펑 쏟아지네. 거기도 오니?'

남편의 카톡이 아니었다면 창밖을 못 본 뻔했어요. 거대학교 보건실은 창밖을 볼 새 없이 몰아치는 환자들에, 

쏟아지는 공문에 아이들 하교할 때 까지는 너무 바쁘거든요.


아.. 정말 첫눈이 너무 펑펑 오네. 이쁘다.

그래도 퇴근할 때 까진 그치겠지?

어릴 땐 눈이 온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너무 신이 났는데 나이를 먹고 나니 

예쁜 함박눈이 영화처럼 로맨틱하게 쏟아지고 있는데도 퇴근할 걱정부터 하고 있어요. 

이런 게 나이 먹어서 슬픈 건가요?



일요일 아침,  실컷 늦잠을 자고 일어나 커튼을 열어젖혔는데 그때처럼 너무 예쁘게 눈이 날려요.

아시죠? 눈이 예쁘게 올 때는 위에서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한번 내렸던 눈이 다시 위로 날아올라 

'나 예쁜 함박눈이야. 너 그냥 보고만 있을 거야? 빨리나 와~ 나 흔하게 아무 때나 막 내리는 애 아니라고~" 

하면서 한껏 뽐내면서 내린다는 것을요.


남편과 아들과 저에게 맛있는 일요일 된장찌개를 아침식사로 선물하고 어제 산 예쁜 털모자를 쓰고 공원을 산책하기 위해 나섰어요. 일요일이라 이르다고도 할 수 있는 아침 10시였는데

 아이들은 정말 잠도 없는지 벌써 나와서 눈사람을 만들어 놓았네요.

 (디테일이 살아있는 걸 보니 아이들이 만든 거라는 제 고정관념일 수도 있겠네요.)

 

솔잎 머리카락에 나름의 귀까지 엄청 심혈을 기울였어요.


눈사람을 보니 초등학교 보건샘이던 시절이 떠올라요. 

지금은 고등학교에 있어서 사춘기 아이들의 낭만이 있긴 하지만 초등학교만큼 아기자기 만 맛은 덜해요. 

초등학교에서 눈 오는 날 가장 인기 좋은 샘은 누구인지 아세요?  바로 무조건 밖으로 내보내는 샘이에요. 

억지로 잡아두고 수업을 해도 사실 수업이 안되긴 해요. 모두들 창밖만 바라보고 있거든요. 

그래서 많은 샘들은 눈이 오면 아이들과 함께 밖에서 수업을 하죠.


그럼.. 눈이 쏟아 짐과 동시에 밖으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을 보며 보건샘은 무엇을 할까요?




바로 세숫대야를 준비합니다. 

으잉? 세숫대야? 눈을 대야에 긁어모아 눈사람 만들기 좋게 도와주려고 하는 건가?

눈싸움할 때 만들 눈덩이를 위해 눈을 모아주기 위함인가?

뭐 그런 추측들도 나름 아이들의 눈 오는 날 만끽을 위해서 필요할 수 도 있겠지만 저의 전공과 관계가 있는 환자와 관련된 치료행위라고 할 수 있어요.





"샘 ! 손에 감각이 없어요."

"샘 ! 손이 움직이질 않아요."

"샘 ! 손이 터질 것 같아요."

장갑도 없이, 혹은 방수가 되지 않는 털장갑을 끼고 손이 꽁꽁 얼어붙는 줄도 모르고

 마냥 뛰어노는 아이들의 손을 눅여주기 위해 보건 샘은 눈이 오면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놓는답니다.


눈 오면 아이들이 먼저 알고 다 쏟아져 나와요.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 끝날 때 쯤에 손이 꽁꽁 언 아이들이 그제야 손에 감각이 없다는 걸 알고는 

보건실로 몰려와요.  심각한 동상이 아닌 이상 보건실에서 해줄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처치는

 세숫대야에 든 따뜻한 물을 선물하는 거예요.  

따뜻한 물에 손을 삭~ 담그면 꽁꽁 얼어붙었던 

손이 녹으면서 금세 감각도 돌아오고 멀쩡 해지거든요. 


1학년 동생, 3학년 언니, 개구쟁이 6학년 형도 모두 따뜻한 보건실 세숫대야에 

손을 담그고 눈 놀이에 대한 이야기로 소란스럽네요. 

"야 너 등에다가 눈을 집어넣으면 어떡해! 차가워 죽을 뻔했잖아! 하하하하"

"이따가 쉬는 시간에 우리 담임선생님도 같이 나온다고 했으니까 우리 완전 똘똘 뭉쳐야 돼!"

 깨끗하고 뽀송하던 보건실이 어느새 눈을 뒤집어쓴 아이들 덕분에 질척 질척 지저분해졌지만 

따뜻한 물이 든 세숫대야 하나로 마음까지 사~악 녹아든 아이들을 보니 청소쯤은 아무것도 아니네요.



우리도 눈싸움 한번 하실래요? 

아으~ 추워 추워!  

우리는 그냥 따뜻한 세숫대야를 준비해주는것으로 만족하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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