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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Feb 06. 2023

호구 선생님3

자존감이 형성되는 과정

  보건교사로 살아온 지 12년이 되었다. 가급적 친절하려고 노력했고, 아이들의 이름을 외워서 불러주려고 노력했다. 명석이도 노는 아이들 무리였지만 이름을 외워서 불러주던 아이였다. 몇 주 전에도 명석이 무리 중 한 명이 수업시간에 교사의 노트북을 던져서 교권보호위원회가 열렸었다. 또 다른 아이는 급식실에서 지정된 좌석에 앉지 않고 지들끼리 모여서 밥을 먹겠다고 우기고 그걸 제지하는 교생을 밀치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문제를 일으켰기에 그 아이들은 교사들의 기피대상이다. 그래도 그 아이들이 보건실에 올 때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들어왔고, 적대 감 없이 나를 대했다. 아이들이 나쁜 아이들이라고 듣기만 했지 보건실에서 직접 내가 겪은 것은 아니었기에 선입견을 가지지 말자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상냥하게 대했고, 성의껏 치료했고, 발목이 아플 땐 정성껏 붕대를 감아주었다.  학교 여기저기서 미움받는 아이들 그냥 나라도 잘해주자 라는 생각이었다. 뭐 그렇다고 내가 대단히 사명감이 있는 사람은 아니다. 화내고, 지적하는 것보다 친절하게 대해주면 오히려 보건실에서 빨리 나가기 때문에, 또 나도 화내고 나면 너무 힘드니까 그저 그래서 적당히 친절했다.  

  

보건실에서 만큼은 예의 바른 그 아이들을 보며 가끔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아이들 다룰 줄 모르는 교사들이라고 속으로 한심해하기도 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샘들이 먼저 훈계조로 말을 했으니까 애들이 그렇게 반응했겠지. 아니 얘네들 봐. 얼마나 착하냐고. 애들은 진짜 어른하기에 달렸어. 명색이 선생인데 애들하고 똑같이 굴어야 쓰겠어? 좀 너그럽게 보고, 하나하나 지적하지 말고, 넘어갈 건 넘어가주고 말이야. 애들하고 라포형성이 먼저잖아.  교육자의 기본 아닌가? 일단 관계형성이 되어야 진짜 혼낼 일이 생겼을 땐 말이 먹히지 않겠어? 


관계형성, 적당한 친절함을 나 잘났다고 부르짖던 결과가 지금의 내 꼴이다. 

좋게 좋게. 너그럽게. 하나하나 지적하지 말고. 넘어갈 건 넘어가주고 했던 결과가 지금 내 앞에  정액이라는 선물로 돌아와 있다. 

내가 만약에 무서운 선생님이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만약에 잘못을 볼 때마다 지도하고 훈계하던 선생님이었다면 어땠을까? 

보건실에서 지켜야 할 것들 엄격하게 정해놓고 아이들에게 지키게 했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기라도 했을까?



학교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보건실이라는 특정한 장소에서 성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처리하려고 하지 않고 있는 이 현실 또한 나를 힘들게 한다. 

담임과 부장교사는 처음 정액을 목격하고 격하게 반응은 보였으나 훈계 이상의 어떤  진행도 하고 있지 않다. 

교감은 그나마 바로 절차를 떠올리고 성사안이라 절차상 여교사가 상담을 했을 때 역공을 당할 수도 있겠다며 바로 남교사를  빠르게 보건실로 보내줬고, 교장에게도 보고했다. 학생부에도 얘기하며 가장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 교감 덕분에 일의 진행은 되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업무분장 얘기를 끊임없이 하는 있는 이 사람이 공무원 조직에 대한 허탈함을 느끼게 한다.



 '나를 지켜주려는 사람이 없다.  내가 과한 반응을 하는 건가? 그냥 못 본 척 넘어갔었어야 했나? 괜히 일을 크게 만드는 건가? 이런 일로 상처받는 내가 좀 예민한 건가? 앞으로 학생들을 치료하고 안정시키는 일에 

심각한 심리적 타격을 입었는데 그냥 별것 아닌 일인 건가? 분노와 두려움과 혼란함에 휩싸여 있던 나를 이제 나 스스로가 의심하고 있다.  나는 그냥 그런 일 당해도 괜찮은 사람인 건가. 나 그런 사람인가 봐.'

혼란스러운 마음에 작은 해결의 씨앗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초등학교 교사로 평생을 살아온 친정오빠에게 전화를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너무 충격받았다고.

차분히 듣던  우리 오빠는 고2 남학생이 자위를 하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뭐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럴 수 있겠단다.  내가 예민하게 구는 거 같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스스로 위축이 되기 시작했다. 

'아 그러네. 내가 오버하고 있네. 내가 예민하게 구는 거구나. 그럼 내가 당당히 피해호소를 하는 게 너무 난리를 피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네. 그럼 동료들한테 미안하고, 학생도 부모도 나를 역으로 걸 수도 있겠어. 아 그냥 넘어갈까 머리 아픈데. '


오빠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던 정신적인 아버지였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내가 피해호소를 할 때마다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뭐 그까짓 일로. 뭐 그렇게 까지. 그냥 넘어가줘라. 네가 예민한 거야. 너도 빌미를 줬겠지.  엄마도 늘 같은 반응이었다.

'그래 이번에도 내가 잘못한 게 있었던 거야. 내 잘못도 있었던 거야...'

난 이제 학생보다 나 스스로를 의심하고 자책하며 위축되어 가고 있다. 



뒤이어 남편에게 전화를 했는데 남편의 반응은 극명하게 달랐다.

"남학생이  자위하는 거 자체야 너무 자연스럽지.  그런데 보건교사와 단둘이 있었던 공공장소에서 자위를 하는 것이 그럴 수 있다고? 어디 여교사 혼자 있는 곳에서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있어. 그 정도면 병이고 범죄행위야. 이건 그냥 넘어가 줄 수 있는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고! 경찰에 신고하자! "

"아니 뭐 신고까지 해? 그래도 나 교사잖아. 학생을 어떻게 신고를 해." 

"너 정신 똑바로 차려. 교사면 피해를 당해도 돼? 여교사 혼자 있는 곳에서 정액을 배출한 놈이 그게 충족이 안 됐으면 무슨 일을 했을 줄 알고. 이번에 아무 일 없이 슬쩍 넘어가면 걔는 승리했다고 생각할걸? 그리고 그 뒷감당은 누구 몫일 것 같아? 교장? 교감? 학부모? 그냥 눈감아준 니 책임이 되는 거라고! 

당장 CCTV 설치, 비상벨, 커튼 철거 해달라고 하고, 교사 보호조치 안 되면 출근 안 하겠다고 해. 그리고 당장 위원회 열고 회의하고 보호받아야지.  내가 당장 갈 테니까 딱 있어."

당장 학교로 오겠다는 남편을 겨우 가라앉히고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해 보았다. 


그냥 좋게 넘어갈까? 내가 좀 예민하게 구는 건가? 내가 받은 피해가 그렇게 큰 건 아닌가 하는 나의 의문들은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어릴 때부터 내가 피해를 호소할 때면 어른 중에 누구도 나를 위해 목소리를 내주지 않았다. 심지어 가족들도 네가 무언가 잘못한 게 있을 거니까 조용히 넘어가라고 했다.  

'어른들 얘기처럼 나도 모르게 무언가 빌미를 줬을 수도 있어. 그리고 내가 이런 취급을 당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걸 수도 있어.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은 없으니까 그냥 그래도 되는 사람인 거야.'

나의 낮은 자존감이 어렸을 때부터 서서히 형성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일을 당해도 마땅한 사람. 그냥 넘어가야 하는 사람으로.(나의 친정가족들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경제적으로 버거웠던 홀어머니와 세자녀의 가난하고 고된 환경이 가엾게 느껴진다.)


 결혼 후 남편에게 또 스스로도 열심히 자신을 보호하며  자존감이 많이 회복되었지만 중력이 끌어당기듯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자존감은 다시 땅으로 곤두박질치곤 한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나는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당당하게 보호조치를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당연한 것이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다. 다시 한번 마음을 먹으니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선명하게 떠오르며 머릿속이 맑아진다. 


 '이제부터 나를 스스로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굳은 마음을 먹겠다.  강경하고 확고한 말투를 장착하고 이 사안을 결코 이대로 넘겨버리지 않겠다는 내 의사를 명확하게 전달하겠다.  내가 우물쭈물하며  '내가 좀 예민한가'? 하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  상대방도 똑같이 느끼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 나는 내가 느낀 그대로 분노하고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려고 한다. 그리고 나는 피해교원으로써 당당히 보호조치를 요구하겠다. 그래야 상대방도 이 교사가 상처를 크게 받았구나. 절차상 잘 처리해야 되겠다. 신속하게 처리해야 되겠다. 생각하고 실제로 행동도 그렇게 하며, 결과도 좋은 결과를 불러올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내가 원하는 결과가 도출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내가 끝까지 노력했기 때문에 깨끗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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