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남은 시간
맑은 가을날, 사람들은 서울의 한 검진센터에 모였다. 그들은 설문지를 받아 들고 그동안의 생활을 되돌아보며 충실히 대답했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묻는 질문이었다. 평균 기상 시각은 몇 시입니까? 출근과 퇴근은 몇 시입니까? 평일에 운동에 투자하는 시간은 어느 정도입니까? 주말에 가족과 대화하는 시간은 몇 시간입니까?,,, 건강 검진 전에 하는 평범한 설문지 같았다.
예상치 못한 검진 결과가 나왔다. “이런 상태라면 6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갑작스럽게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당황한 그들 앞에 놓인 검진 결과서. 일하는 시간, 잠자는 시간, 스마트폰을 하는 시간, 친구들을 만나는 시간,,, 남은 인생에서 이 시간들을 빼면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된다. 그들이 선고받은 시간은 남은 인생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새삼스레 가족과 함께한 시간들을 돌아보며 펑펑 눈물을 흘렸다. 많은 사람들을 뭉클하게 만들었던 광고였다.
작년 12월, 연말까지 사용하지 않으면 소멸하는 항공 마일리지가 있었다. 부랴부랴 시골집에 다녀올 계획을 세우고 비행기 티켓을 구매했다. 이런저런 일들로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계획을 2월, 5월, 8월, 10월로 계속 미뤘다. 항공권 유효기간은 1년인데 다시 12월이 됐다. 더 이상 미룰수 없어 시골집에 다녀왔다.
나는 시골집에 가면 주로 언니네 집에서 머무른다. 내가 갈 때면 부모님도 언니네 집으로 오셔서 같이 식사를 하고 놀다가 잠을 자곤 했다. 그런데 12월 시골은 한창 바쁠 시기였다. 눈이 오기 전에 마무리해야 하는 일들이 있어 하루도 쉬기가 어렵다. 부모님이 언니네 집으로 오실 수 없다고 하자 나는 둘째 날 저녁 서둘러 부모님 댁으로 갔다.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부모님과 저녁을 먹고 식당 앞 가로등 불빛 아래서 헤어졌다. 3박 4일 일정에 부모님과 마주 앉아 밥을 먹은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 나는 다시 언니네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밤길 운전이 위험하다며 엄마는 등 떠밀듯이 나를 보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생각하니 아찔했다. 부모님과 함께하는 식사가 1년에 겨우 한 끼라니. 백세 장수의 축복으로 부모님이 앞으로 30년을 더 사신다고 해도 서른 끼다. 각자 삶으로 바빠 아침 점심은 각자 먹고 저녁만 모여서 먹는 다정한 가족의 한 달치 저녁 식사다. 삼시세끼 함께 먹던 시절을 생각하면 겨우 열흘 치밖에 나에게 남지 않은 셈이다.
자식들은 착각한다. 부모님과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도 무한대로 남아 있을 거라고 마음대로 생각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다음으로 미룬다. 한 달에 한 번씩 한 끼를 함께 한다고 해도 결코 많은 기회가 아닌데도 되는대로 살아가다 보면 그마저도 쉽지 않다. 부모님과 함께 하는 저녁식사가 얼마나 남았는지 헤아려보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하고도 중요한 일임을 깨닫게 된다. 더 자주 내려가고 더 오랫동안 머물러야겠다.
서둘러야겠다.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
눈을 마주 보며 밥을 먹고 삶을 이야기할 시간.
다음으로 미루기에는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