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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지식in Nov 27. 2022

'열정 포르노'와 악의 평범성

노량진에 오기까지


나는 무죄입니다.



1961년 4월 어느 법정은 긴장감이 맴돈다. 손에 땀이 나고 곳곳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한 남성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린 사람들. 우뚝 솟은 코 사이로 뿔테 안경이 균형 잡혀 있고 그의 표정과 말투는 온화하다. 긴장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금방 자다 일어난 듯 피곤해 보일 뿐이었다. 또박또박 말하는 그의 행동에 범죄자는 없었다. 그저 평범한 옆집 아저씨에 가까웠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다는 남자. 극악무도한 악마를 생각했던 사람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수백만 명을 잔인하게 학살한 범죄자는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독일 나치 정권 히틀러의 오른팔이자 홀로코스트 설계자다. 젖동냥을 떼지 못한 신생아부터 울부짖는 어린 소녀들까지 닥치는 대로 가스실로 밀어 넣었다. 유대인 말살이라는 목표 아래 민족 대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피의 숙청이다. 아비규환 가스실과 온화한 옆집 아저씨. 역설적인 부조리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상황을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으로 요약했다. 생각 없이 성실한 게 죄가 된 것이다. 성실성의 역설. 목적과 방향을 잃은 성실함은 공동체를 파멸로 인도한다. 아이히만은 성실하게 일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악이라고 법정에서 반문했다.   



■ 악의 평범성으로 이끈 '열정 포르노'


예루살렘에서 펼쳐진 세기의 재판에 사람들은 경악한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한없이 인자했던 사람은 어떻게 극악무도한 전범이 됐을까. 그를 악의 평범성으로 이끈 것은 바로 '열정 포르노'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생각. 맹목적인 생각과 행동이 온몸에 전이됐고 스스로 당위성을 만들어냈다. 관음증을 불러일으키듯, 당위성을 주변으로 끊임없이 전파한다. 마치 독버섯처럼. 모금을 유도하기 위해 곤경에 처한 이들을 자극적으로 묘사하듯, 열정의 강도는 점차 강해졌다. 공식적인 면죄부를 얻기 위해 주변의 인정이 필요한 것이다. 두 눈과 귀를 닫으면서 상황만 악화된다.


문제는 목적 없는 열정에 있다. 사랑 없는 섹스가 공허하듯, 목적 없는 열정도 공허하다. 열정이 빠지고 그 자리에 포르노만 남는다.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 꼬리가 몸통을 뒤흔든다. 두터운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열심히 산다고 스스로를 자위할 뿐이다. 누구보다 성실했던 아이히만은 나치 친위대 중령에서, 유대인 이주국 책임자까지 탄탄대로를 걸었다. 온화한 표정과 꼼꼼한 열정 덕분에 히틀러의 오른팔까지 등극한 것이다. 수백만명의 목숨은 그의 행동 하나에 한 줌의 재가 됐다. 목적 없이 성실한 '열정 포르노'는 그래서 위험하다. 본인이 열심히 사는 대로 생각할 뿐이다.



■ 성실성의 역설, 우리 주변의 아이히만


언론사 기자 시절일이다. 나 역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다. 매일같이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아침부터 조간신문 10여 곳을 요약했고, 구두창에 땀이 나도록 뛰었다. 월화수목금금금 일하며 스스로 열심히 살고 있다고 자위했다. 그때도 그랬다. 세월호 참사 당시 당직을 서면서 기계적으로 속보를 날렸다. 1분 1초 촌각을 다투는 중요한 상황이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다른 언론사 기자들도 비슷했다. 그게 면죄부가 됐다. 목적 없는 성실함이 모여 집단을 형성했다. 2014년 4월 16일. 군집한 기자들은 집단사고로 침몰했다. 그때 기자들은 지금도 잘 살고 있을까. 비단 언론사뿐만이 아니다. 경찰과 공무원, 사기업과 주변 곳곳에서도 아이히만은 존재한다.


시작은 창대했을지 모르나 끝은 초라했다. 열정 포르노에 사로잡힌 이들이 그랬다. '나의 투쟁'으로 독일 국민들을 전쟁 소용돌이로 몰아세운 히틀러, 홀로코스트 설계자 아이히만, 선동가의 혀를 자처한 괴벨스까지 인생 마지막은 허망했다. 광기에 사로잡힌 서사극의 끝은 낭떠러지였다. 누구는 자신을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겼고, 누구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형장의 이슬과 함께 그렇게 역사 뒤안길로 사라졌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 영화 '더 리더' 中 -



<작가가 궁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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