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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지식in Nov 24. 2022

영화 '8마일'과 노량진 2동

노량진 언저리에서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

- 영화 '8마일' 中 -



고장 난 차들이 휴지 조각처럼 구겨져 있고, 길거리 곳곳은 쓰레기들이 나뒹군다. 삼삼오오 모인 작업자들 얼굴에는 그늘만 뒤덮였다. 작업복은 기름진 얼룩들로 장식했고, 다람쥐 쳇바퀴처럼 움직일 뿐이다. 내일이 있을까.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 눈빛도 풀려 있다. 썩은 동태처럼. 디트로이트 8마일.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제조업 도시였으나 빚더미만 쌓인 빈민가. 곳곳에 녹슨 자동차 부품처럼 도시 전체도 어수룩하다. 스산하다. 러스트 벨트를 장식하듯, 부유층과 빈민가 사이를 걸치고 있는 도로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아니 그의 삶이 시작된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부품을 조립하는 어느 노동자. 그의 이름은 래빗이다. 토끼처럼 피부는 하얗지만 그의 가사는 가볍지 않다. 꿈과 좌절, 희망이 가사 한 줄에 담겼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현실이 야속할 뿐이다. 그럴 때마다 그는 펜으로 분노를 꾹꾹 눌러썼다. 버스에서 보이는 가게 간판들이, 친구와 함께한 농담이, 더러운 작업장 환경이 가사에 스며든다. 그의 희망은 역설적이게도 분노에서 시작됐다. 꿈은 한없이 높은데 인생이 시궁창이다. 삶이 곧 힙합이다. 폭식하듯 써 내려간 날 것 그대로를 토해 뱉었다. 미국 래퍼 에미넴의 이야기다. 언더그라운드 실화를 바탕으로 펀치라인이 짜인 돌직구가 날아온다.



■ Lose yourself, 추락하는 것에 날개는 없다


현실이 시궁창이었다. 나도 그랬다.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없던가.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었다. 노량진에서 컵밥을 먹고 있는데, 작은 텔레비전에서 희끗희끗 영상이 보였다. 한때 한솥밥을 먹던 방송사 뉴스였다. 친했던 기자들이 보였다. 기자 수첩과 마이크를 잡던 손으로 지금은 컵밥과 숟가락을 쥐고 있다. 움켜줬지. 누구보다 세게. 한없이 작아지는 내가 있었다. 초라했다. 난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자리를 떠난 사이 언론사 친한 선후배들과 동기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잡았다. 주말과 저녁뉴스에 아는 앵커들이 보였다.


뉴스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전화번호도 바꿔버렸다. 그럴 때마다 펜을 꾹꾹 눌렀다. 늪 같은 현실에서 일기를 썼다.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 깊숙이 빠져드는 늪. 출구는 없었다. 그날도 그랬지. 모의고사를 망하고 슈퍼에서 팩소주 한각을 샀다. 힙합 음악을 들으며 소주를 한 잎에 털어 넣었다. 시뻘건 팩소주 표지 마냥 혀끝이 얼얼했다. 머리가 핑핑 돌고 가슴속 응어리가 느껴졌다. 시험지에는 빨갛게 비가 내리고 마음도 폭우가 빗발쳤다. 무심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쏟아지더라. 준비되지 않은 소나기를 맞이하듯,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한없이 걸었다. 빗물의 짠맛과 소주의 단맛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때 들었던 노래가 에미넴의 'Lose yourself'였다.


노량진 컵밥 거리를 지나 배회하는 수험생들도 그렇다. 하나같이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있다. 기약 없이 흐르는 시간, 기계처럼 반복하는 문제풀이, 꼬깃꼬깃 운동복을 걸친 수험생들, 영화 '8마일'과 노량진은 다른 듯 묘하게 닮았다. 막노동판을 뛰면서 공무원을 준비하는 수험생, 육아와 공부를 병행하는 경력단절 여성, 9회 말 2 아웃의 중고 신입들까지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있다. 취업시장의 종착역인 노량진에서 열에 아홉은 내일이 막막하다.



너에게는 한 번의 기회가 주어져
절대 포기하지 마 인생에 단 한번.

- 에미넴 'lose yourself' 中 -



심장소리가 쿵쾅거리고, 무대가 가까워질수록 둔탁한 비트 소리가 웅장하다. 온몸은 만신창이였다. 상대 패거리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래빗. 한쪽 눈은 이미 부어 있었다. 그래도 눈을 감지 않았다. 인파이터.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지 않는 인파이터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한 대 때리고 두대 더 때릴 깡이 있다. 에미넴은 시험장을 들어서듯 무대 위로 오른다. 사람들의 초롱초롱한 눈빛들이 보이고, 목소리와 가사 한 줄 한 줄에 그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이날을 위해 고생했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뭉뚝한 펜 끝을 날카롭게 벼리고 세치의 혀는 죽창이 되어 상대 숨통을 겨눈다. 무대는 이미 에미넴만을 위한 링이었다. 그 자리에서 에미넴은 인생에서 다시 못 올 기회를 움켜쥔다.


에미넴은 힙합을 넘어 전 세계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우뚝 섰다. 2000년대 전 세계에서 음반 판매가 가장 많았고, 최초로 10개 앨범 연속으로 '빌보드 200' 1위로 데뷔시킨 아티스트였다. 약물 중독과 가정 폭력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마약중독자로 숱한 자살시도를 한 아내와 이혼했지만 불우했던 그의 가정사는 오히려 그를 더 강하게 이끌었다. 가사에서 패드립이 난무하고 주변 환경 모두 까기를 시전 했던 에미넴이지만 적어도 마이크 앞에서는 솔직했다. 힙합신의 악동과 랩 갓, 딸바보까지 에미넴은 시궁창 같은 삶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진흙탕을 전전하던 영화는 묵직한 한방을 날리며 피날레를 장식한다.


Don't lose yourself.

너 자신을 잃지 마



<작가가 궁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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