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랑하는 우리 토끼
작년 11월에 우리 토끼가 세상을 떠났다. 함께 10년을 있어주었던 희망이는 내 어깨 위에서 하룻밤을 잔 다음에 마지막으로 사과 조각을 조금 갉아먹고 토끼별로 떠났다.
그 뒤로는 동물을 키울 엄두가 안 난다. 동물 친구와 함께하는 기쁨과 동시에 슬픔도 알아버린 탓이다. 언젠가 우리 토끼가 내 곁을 떠날 거란 걸 알고 있었고 약속된 슬픔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토끼의 평균 수명은 3년에서 5년 정도라고 해서 사실 나는 내 작은 토끼가 세 살이 되던 순간부터 끝을 두려워했다. 하얀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얘가 나보다 오래 살 거라고, 오천 년을 살 거라고 말했고 지구 멸망까지 볼 거라고도 했다. 사실 그걸 정말로 바라지는 않았다. 세상의 끝을 보면 너무 외로울 테니까.
세 살이 되었을 즈음부터 문득 이 작고 하얀 존재가 사라지는 미래를 두려워하고 이 촉감을 그리워하게 되는 날이 올 것임을 선명하게 느끼며 모든 것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불안감을 품은 상태로 7년이 흘렀다. 우리 토끼가 건강하게, 그리고 내 불안보다도 훨씬 오래 있어준 나머지 나는 정말로 희망이가 아주 아주 오래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끝은 결국 왔고 많이 슬펐다.
토끼를 볼 때 마음 한편으로는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나는 희망이가 있어서 덜 외로워졌는데, 희망이는 나를 만나 더 외롭지 않았을까. 희망이가 내 외로움을 덜어가주어서 나는 덜 외로웠고 이제 그 외로움은 다시 돌아와서 나는 희망이가 떠난 후로 훨씬 더 외롭다.
희망이가 떠난 날은 입동이었다. 아무래도 겨울은 추우니까 따뜻한 토끼별로 갔겠지, 생각한다. 그리고 죽고 나면 생전에 키웠던 동물 친구가 마중을 나온다는 이야기를 떠올린다. 믿든 믿지 않든 다시는 희망이를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도 희망이가 토끼별의 풀밭에서 낮잠을 자고 꾸벅꾸벅 졸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 위안이 된다. 내가 다시 만날 수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저 좌표만이 달라졌을 뿐이라고.
상실에 대처하는 방법 중에서 전에 유효했던 것은 부재도 존재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희망이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상상은 고통스럽다. 고통이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의 총칭이라면. 희망이는 내가 갈 수 없는 곳에서 잘 지내고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