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무한해질 수 있다면
이미지 속 문장들은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Tropic of Cancer》두 번역본의 일부이다. 이 책을 처음 펼쳐봤을 때는 김진욱 번역가가 옮긴 판이었고 후에 다시 이 책을 찾았을 때는 출판사는 같았음에도 정영문 번역가가 옮긴 판이 꽂혀 있었다. 두 번째로 읽은 《북회귀선》은 처음 접했던 《북회귀선》의 느낌과 달랐기에 첫 번째로 읽었던 번역본을 찾아내어 중고로 책을 샀다. 어느 번역이 더 좋은지를 떠나서 처음 접했던 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의 텍스트에서 출발했다 한들 다른 느낌으로 닿았기 때문에.
우리가 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사실 다른 모습을 보고 있다는 것은 독서를 할 때도 동일하다. 한 좌표에 동시에 여럿이 서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도 다른 누군가와 완벽하게 동일한 시선을 가질 수는 없다. (저는 저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저는 태어났고, 죽을 것입니다. 저는 팔다리가 붙어 있습니다. 어떤 다른 물체도 제가 차지한 지점을 동시에 차지할 수 없습니다. 《1984》조지 오웰, 문학동네, 김기혁 역) 만약 나무가 있는 언덕을 떠올린다면 모든 상상 속 나무가 오렌지나무일 수는 없고 그 이파리의 수가 같을 수도 없다. 아무리 자세한 문장이라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똑같이 보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세상에 완벽히 객관적인 단 하나의 사실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실이란 태생적으로 누군가에 의해 목격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는 모국어로 작성된 문서를 비롯하여 모든 종류의 읽기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번역을 거친 문장은 그 사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번역에 창조성이 있다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읽기에 있는 것이며, 번역은 일차적으로 쓰기보다는 읽기의 문제다.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정영목, 문학동네) 원어로 적힌 단 한 문장을 보고도 번역가들의 해석은 제각기 다르고, 따라서 같은 문장에 뿌리를 두었으나 동일하지 않은 번역이 탄생하며, 각기 다른 번역본을 읽은 사람의 독서 경험 역시 다를 수밖에 없고 심지어는 동일한 번역본을 읽더라도 느낀 바가 각각 다르다. 같은 원문을 읽은 번역가들의 해석이 각각 달랐던 것처럼.
가장 우월한 번역을 가리고 싶다거나 무엇이 정역 혹은 오역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역誤譯이란 단어에서 드러나듯 이미 옳고 그름의 문제를 내포한다. 시비의 문제가 결코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맞는 것과 틀린 것으로 나누어지지는 않는다. 한정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자주 <다르다>고 말하는 대신 <틀리다>고 말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옳은 것을 가려내는 것은 사실 극도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르다고 말하는 것보다 틀리다고 말하는 것이 간편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비교가 필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A가 B보다 낫다>고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분법은 사고의 풍요로움과 자유로움을 좀먹는다.
그러나 수많은 번역들은 하나의 대상을 보는 다양한 시각이 자연스러우며 어느 하나 틀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오렌지나무보다 사과나무가 있는 풍경이 더 우월하지 않으며, 이파리가 적은 나무에 대한 상상이 더 열등한 것도 아니다. 문장들은 그 자체로써 정오표를 앞에 두고 끊임없이 시달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같은 것을 보면서도 전부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 사실이면서도 경이로운가. 이는 또한 언어에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을 풍부하게 만든다. 누군가는 바벨의 붕괴와 함께 일어난 언어의 분화는 인류의 오랜 고통이라고 말할지도 모르나 각기 다른 말을 쓰기 때문에 번역이 필요했고 번역이 없었다면 인류는 이러한 즐거움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 즐거움까지도 고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언제고 부정당하기 바쁜 타인의 관점은 언어의 풍요로운 즐거움으로 치환하여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번역은 그 자체로 제각기 다른 시선들에 대한 긍정이다. 시선이 닿는 곳에서 탄생하는 세계에는 한계가 없다. 수량의 제한 혹은 옳거나 틀린 것도 없이 질량이나 부피에 구애받는 현실로부터 벗어난 관념의 세계에서 우리는 무한해진다. 언어의 세계가 무한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