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인생의 반을 나 자신을 부정하는 데 썼다. 내가 느끼는 것을 부정하고 내 판단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나의 존재가치에 대해 깎아내리며 살아왔다. <나다운> 것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나다운 것이 뭔지 모르면서 내가 아니고자 했던 몸부림들이 변화보다는 자기파괴에 가까운 것은 당연했다. 존재라는 것은 언제나 지나치게 묽은 밀가루 반죽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될 수 없고 흐물흐물하게 손에 엉겨붙는 반죽.
늘 망치질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 자신을 깨부수고 싶어서 수백 번을 내리치는 망치질 소리. 그 시끄러운 소리들 속에서 살아가다가 깊은 새벽에 사위가 조용해지듯 정신이 깨끗해졌을 때 비로소 나는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었다. 상쾌한 찬물에 몸을 씻는 듯한 깨달음이었다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웠다. <그렇구나>라는 느낌이었다.
좋은 것은 도무지 싫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싫은 것은 도무지 좋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어떤 생각도 필요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지 않다고 느낄 수 없듯이 반대로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나 이외의 것이 될 수 없구나. 아주 오랫동안 왜 장미는 장미인지, 푸른색은 왜 푸른빛을 띠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 모든 일에 이유를 물을 필요는 없었다. 스스로가 느끼는 방식 이외의 방식으로 느낄 수는 없다는 깨달음은 느리게 찾아왔다. 실패가 쌓여 형상이 되고 있었다. 뜨겁다는 느낌을 어떻게 다르게 받아들이겠는가. 차갑게 느껴지는 것을 어떻게 그렇지 않도록 느낄 수 있겠는가. 나 자신이란 감각하는 방식의 이름에 가까웠다.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 내가 없어지기를 바랐었다. 나를 증오하는 누구도 나만큼 바랄 수는 없었다. 자신을 아주 잘게 쪼개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사라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자아의 존재가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한다고 믿는 것처럼. 그러나 무한히 작아질 수는 있을지언정 사라질 수는 없다. 햇살이 드는 작업실에 앉아 온 사방이 반짝이는 것을 본다. 손때 묻은 망치와 햇빛을 받아 유리가루처럼 반짝거리는 나 자신의 파편들이 그렇게 말한다.
결국에는 수많은 실패가 이제는 나를 걷게 한다. 고통이 가치롭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고통 없이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단지 그것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성공이 쌓이면 당연히 커다란 상록수 같은 것이 되겠지. 그러나 실패가 쌓여 무언가가 되기도 한다. 그 수많은 자기부정을 거쳐 없어지지 않는 덩어리를 발견한 것과 마찬가지로.
물론 늘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 뒤로 나 자신을 깨트리고 싶은 마음이 솟을 때면, 이미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봤다는 생각이 들어 망치를 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러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나 자신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생각한다. 상록수가 그곳에 있다면, 상록수만이 숲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