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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환 Sep 28. 2022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

핸드폰을 한참 동안 만지작거리다 결국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잘 지내? 하루에 한 번 이상 벽보고라도 이야길 해야 돼. 안 그러면 말하는 법 잊는다. 사무실이지? 점심 어때? 지금 바로 나올 수도 있다고? 아니야. 내가 시간이 좀 걸려. 전에 봤던 거기서 봐.’


회사를 타의로 그만두고 집과 집 근처 사무실에서만 맴돌던 후배가 걱정되었다. 사무실을 예전 직장 근처로 옮기라고 강권했지만 후배는 망설였다.  


‘나 사실 쫒겨난거잖아.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


다른 존재와 교류를 끊은 지 한참이 되었건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10여 년 전, 후배는 나와 같은 팀에서 일했다. 회사의 이익이 급격히 축소되었다. 팀원들은 기죽어 지냈다. 업무와 연관된 다른 팀들은 우리 팀을 왕따시키며 몰아붙였다. 팀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강화될수록 주류에 합류하고픈 욕망도 강해졌다. 맞설 힘이 없으니까. 이미 효용성이 낮은 단위로 낙인찍혔으니까. 사람들은 작고 약한 자를 깎아내고 덜어내어 떨어져 나가게 하는 잔인함을 택했다. 다른 팀으로 이동하길 원하는 팀원도 있었다. 해가 바뀌고 인사철이 가까워지자 몰아붙이는 힘은 더 강해졌다. 신년 단배식에서조차 거친 발언들이 쏟아졌다.  


‘이런 성과로는 팔아 줄 곳이 한 군데도 없어요. 제대로 좀 하세요.’


마케팅 팀장은 신임 사장 앞에서 나 들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새해는 좀 좋아지겠지요. 하하.’


나는 마땅한 방어기제를 찾지 못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기도했다. 그때 후배는 결연했고 용맹했다.  


‘운용성과가 좋아 모두가 성과 보고 우릴 찾아오면 마케팅팀이 필요없지요. 운용성과가 다소 부진할 때도 팔 수 있어야지요. 운용성과가 좋을 때만 팔 수 있으면 마케팅팀이 왜 필요합니까? 지난 해 마케팅팀 성과부진부터 사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후배는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제 뒤를 따르시지요.’라며 길을 헤쳐나가는 호위무사였다.   

약속시간에 정확히 도착한 후배는 소주부터 들이켰다.  


‘형은 형수생일날 얼마짜리 선물했어요? 형도 이번엔 좀 세게 했네. 난 이번에 아내가 갖고 싶어하던 최고급 명품가방을 선물하려고. 부담스러워할거라고요? 진심이 아닐거라고요? 아냐. 우리 집사람은 그런 건 확실히 하는 편이에요. 갖고 싶은 물건은 아무리 비싸도 후회 안하는 스타일. 백화점에서 사면 상품권을 덤으로 준대요. 그건 내가 슬쩍 갖고. 사실 3년 뒤가 결혼 20주년이거든. 이번에 큰 선물하고 20주년엔 작은 걸로 하겠다고 미리 얘기를 해야지. 내가 무슨 돈이 있다고 3년마다 큰 돈을 쓰겠어요. 비싼 거니까 귀하게 쓰라고도 하고. 쪼잔하다고요? 기왕 선물하는 것 뒷얘기들은 다 접어두라고? 안돼. 내가 얼마나 크게 인심쓰는 건데. 근데 형도 명란 좋아하나? 울 엄마가 명란을 잘 만드세요. 내가 동해 바닷가에서 자랐잖아요. 명란양념이 기가 막혀요. 양념 한 통 만드는 데 꼬박 일주일이 걸려요. 조그마한 건 한 통에 오만원인데. 이번 설에 형한테 선물할게요. 어머니께서 귀하게 만드신 거니까 형이 사드리겠다고? 그것도 좋겠네. 그럼 여러 통 사서 다른 분들께도 선물하면 좋겠네.’  


후배는 끊임없이 흥정을 할 것이다. 내가 당신을 설득시키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내 능력 부족이다. 좀더 노력하겠다. 다만 당신도 마음을 닫고 빗장을 걸어두었기 때문에 설득되지 않은 잘못도 있다. 그러니 빗장만이라도 풀어놓으라. 내가 들어갈 자리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는 모색하고 헤쳐나가기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할 것이다. 그가 다시 돌아왔다. 원 톱 영웅이던 그가, 호위무사가 되어 길을 열던 그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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