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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환 Sep 28. 2022

그래야 숨이 쉬어지거든

 내가 원데이 이웃산타 활동을 하기로 한 것은 봉사, 헌신, 선한 영향력 뭐 이런 것과는 관련이 없다. “너도 살아 생전 좋은 일 한번은 해야지.”라는 친구의 강권 때문이었다.  


‘호호 메리크리스마스. 즐거운 성탄이에요. 우리 길동이가 하두 착하고 모범이 된다길래 이리 먼 길을 찾아왔어요. 호호.’  


생각만 해도 닭살이 돋아 손사래쳤지만 친구는 단호했다. 차라리 연탄운반이나 도시락 배달 같은 것을 하겠다고 했지만 그런 일은 지원자가 차고 넘쳐서 필요없다고 했다.


“난 낯가림이 심해서 애들하고 놀아주질 못해.”

난 물러서지 않았다.  


친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제까지 한번도 꺼낸 적 없는 기억을 길어올렸다.


“내가 동아리 활동으로 연극반 한 거 모르지? 내가 낯가림이 심해서 고쳐 보려고 연극반에 들어갔거든. 오랜 연습 끝에 드디어 무대에 올라갔지. 다리가 후덜거리고 앞이 깜깜하고.”


“그래서?”


“그래도 올라갔지. 그리고 기절해서 끌려 내려왔지.”


난 두말 않고 이웃산타 교육을 받았다. 친구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미안했다.  친구는 오랜 방황 끝에 동네 후미진 곳에 작은 도서관을 설립했다. 서울 시내에서 결식 아동이 가장 많은 초등학교 후문 쪽에. 수많은 후원자들을 찾아다니며 거듭 거듭 고개 숙인 끝에 도서관 문을 열 수 있었다. 낯가림이 그리 심한 녀석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태양이를 만난 건 크리스마스 이브날 다가구주택의 지하방에서였다. 이웃산타는 운전자 한명, 방문해서 말을 이끌어가는 인도자 두 명, 선물꾸러미를 들고 있는 한 명, 그렇게 4인이 한 조였다. 난 차에서 대기해도 되는 운전자를 지원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조원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태양이네 집을 더듬어 찾아갔다. 조원들은 집에 사람이 없으니 다른 집으로 이동하자는 의견과 조금 기다려보자는 의견으로 대립되어 있었다. 철문 틈새로  불빛이 보인다며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던 인도자가 철문 안으로 속삭이듯 이야길 했다.  


“태양아 거기 있는 것 다 알아. 네가 보고 싶어서 왔어. 문 좀 열어줄래?”


얼마 뒤 문이 열렸다. 시커먼 어둠속에 널부러진 컵라면 봉지가 보였다. 화장실 냄새와 할머니의 마른 기침소리도 이어졌다.  


 조원끼리 단촐하게 술 한잔하며 평가를 대신했다.  


“인생 쓰잖아. 너무 써서 삼킬 수가 없어. 그래서 설탕이 필요해. 설탕을 쳐서 좀 달달하게 만들면 삼킬 만하거든. 물도 필요해. 하두 쓰니까 희석시켜서 넘기는 거야. 그래서 이웃산타를 하는 거야. 숨이 쉬어지거든.


조곤조곤 빈틈없이 일처리를 했던 인도자가 많이 취했지만 야무지게 활동평가도 마무리해주었다. 후속활동은 인근 종교단체와 주민센터에서 맡기로 했다. 어느 덧 날이 밝았다. 붉은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자 시커먼 어둠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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