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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환 Sep 28. 2022

그게 왜 지옥문입니까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내려야할 정거장을 지나쳤고 몇 정거장을 더 가서야 내렸다. 후회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냥 ‘그래 자네 충분히 아팠고 괴로웠어. 이제 그만 내려놓고 다른 삶을 살아도 돼.’라며 안아주면 될 것을...  


그의 부모는 완강히 반대했다. 같은 부서에서 일했던 그의 연인은 최종학력이 고등학교 졸업이었다. 그녀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녀의 집안은 가난했고 그녀의 꿈도 가난해보였다. 그는 부모의 완강함을 이겨내지 못했다. 오래 깊이 사귀었던 그녀는 그의 얕음을 견뎌내지 못했다.  


부모가 맺어준 인연은 질기도록 오래 이어졌지만 다행스런 것은 아니었다. 신혼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어주던 분이 ‘ 연인이 맞냐? 신혼인 것 맞냐?’ 고 물었다. 물과 기름 같은 관계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살다보면 살아지겠지 라며 살았다. 결과는 참혹했다. 부인은 8년째 신장투석을 하며 삶을 버텨냈다. 이젠 그를 놓아줄 수조차 없었다. 아이는 자폐였다.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은 차가운 겨울 공기를 뚫고 왔다. 지난 겨울 그의 옛 연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겨울 외투를 입은 그녀가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고민하지 않았다. 물려받은 온갖 유산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다른 세상에 속하고 싶었다. 짊어진 무게가 버거웠고 더 버텨낼 수 없었다. 그에게 부과된 역할에 대해 더 이상 성실하지 않았다.  


"형한테 상의하러 온 게 아니예요. 형의 의견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저 내 애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예요. 그냥 내 애기를 들어달라는 거예요. 나한테 보물이 있다고 애기하잖아요.  근데 왜 보물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저 흙탕물일 뿐이라고? 그것 때문에 더러워질 뿐이라고? 차가운 대기 속에서 정전기를 일으킨 그녀의 머리카락이 보였어요. 그녀가 미소지우며 턱을 쭉 내밀었을 때 난 그 턱을 만져보았어요.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입술에 대보았어요. 그녀의 얼굴이 내게 너무도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숨결이 내 뺨을 간지럽혔다니까요. 그런데 왜 그게 보물이 아니예요? 그게 왜 지옥문입니까? 내 삶에 처음으로 기쁨이 돼 준 사람이 왜 지옥이냐구요?"


그의 외침은 깊은 곳에서 길어올려진 것이었다. 그의 삶은 가볍지 않았다. 그를 겹겹이 둘러싼 사회적 기대치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는 그저 평온하고 순진무구한 나날을 살고 싶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값을 치루지 않고 누리는 소소한 일상을 그도 누리고 싶었다. 억압받던 영혼을 자유롭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세상은 그에게 분노를 곱씹어 삭히라 했다. 오래 오래 삭혀서 아름다운 꽃으로 피우라했다. 선택했든 선택당했든 한번 정해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했다. 꾸며낸 행복과 어리석은 만족, 헛된 즐거움에서 깨어나라 했다. 나 역시 그의 짓눌린 삶을 가볍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탁한 공기 속으로, 그는 차가운 대기 속으로  긴 한숨을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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