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긴 넋두리

by 정재환

“혜순이 누나, 저예요. 한 달 뒤가 누나 칠순이잖아요? 그래서 칠순 잔치 계획이 어떠신지 여쭈려고 전화했어요.”

사실 혜순의 동생은 누나의 칠순 잔치 계획보다는 근황이 걱정되어서 전화했다. 혜순은 최근 들어 가족 간의 연락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집안 대소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특히 큰집의 경조사에는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큰집 사촌 형의 첫째 아이가 서울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기자가 되었을 때도 가족 대화방에 상투적인 인사말조차 올리지 않았다. 그 아이가 얼마 안 지나 결혼할 때에는 식장에 오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축의금도 가족 간에 오가는 최소한을 밑도는 금액이었다. 며칠 전 큰집의 흉상에도 조의를 나타내지 않았다. 예의를 벗어난 것이며 큰집 입장에선 업신여김을 당한 것이었다. 초상은 혜순의 어린 시절 가까운 친구이기도 한 사촌의 죽음이었기에 문상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혜순은 끝내 장례식장에 오지 않았다.


“요즘은 다들 오래 살아서 칠순이고 뭐고 안 한다더라. 그래서 간단하게 하려고.”

혜순은 칠순 잔치를 가급적 가족들만 모여 조촐히 치르길 원했다. 다만 유년 시절 벗들은 별도로 초청해 대접할 계획이었다. 혜순의 유년 시절은 어느 세대보다 힘들고 서러웠던 시기였다. 전쟁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재건과 복구를 꿈꾸며 치달았던 시기였다. 물질적으로 가난이 정점에 있었다. 그 시절 친구들과 주름진 얼굴을 맞대고 살아남았음을 축하하고 싶었다.

“가족끼리 조촐히 치러도 큰집 희영이 누나는 초청해야 하지 않을까요? 희영이 누나가 누나를 각별히 보살펴 주신 분이라.”

“그렇긴 한데. 이번엔 그냥 넘어가면 좋겠어.”

혜순은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표명했다. 수화기를 통해 동생의 한숨이 넘어왔다.

“혜순이 누나, 희영이 누나하고 싸웠어요? 요즘 왜 그래요? 누나 집 근처인데 잠깐 들어갈게요.”

혜순이 말릴 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커피 한잔 내릴 틈도 없이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신발장 앞에 이런 스피커가 있던데. 아직 쓸만한 것 같은데?”

혜순의 동생은 들어서자마자 혜순도 모르는 스피커 얘기를 했다.

“처음 보는데? 우리 것 아냐. 다시 갖다 놔.”

“아니에요. 누가 문을 열고 신발장 앞에 갖다 놓을 리가 없잖아요. 매형이 갖다 놓으셨나? 내가 연결해 드릴게요.”

원통형 스피커에는 노란색과 빨간색의 입출력단자가 있을 뿐 외부 전원장치는 없었다. 혜순의 동생은 신발장 한쪽 구석에 있는 공구 가방을 열어 커넥터를 가져다가 스피커를 라디오에 연결했다.

“누나, 연결은 됐는데 스피커에서 소리가 안 나네. 고장인가?”

“매형 오면 해보라 할 테니 과일 드셔.”

사과 한 조각을 다 먹기도 전에 동생 핸드폰이 규칙적인 진동음을 반복했다.

“네. 아하, 당장 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무슨 급한 일인데 바로 가려고 해? 사과라도 먹고 가.”

“미안해, 누나. 급한 에어컨 설치요청이 왔어요. 일손이 달려서 바로 가야 해요. 나중에 전화할게요.”

혜순은 플라스틱 반찬통에 사과를 담아 동생의 손에 넘겨주며 한숨을 내쉰다.

“사느라 고생이 많네.”


“안녕하세요? 혜순 씨.”

동생을 배웅하고 돌아온 혜순은 귀를 의심했다. 누가 날 부를 일이 없는데? 그 사이 집에 누가 들어왔을 리도 없고. 사방을 둘러봐도 조금 전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현관 왼쪽으로 낡은 신발장이 놓여 있고 그 위로 열대어 구피가 한가하게 헤엄치고 있는 어항이 있었다. 맞은편에는 바깥 직사광선을 피해 들여다 놓은 화분 세 개가 있었다.


“저는 혜순 씨 10대조 후손인 진묵 씨의 가사도우미입니다. 이름은 복순입니다.”

혜순은 누군가 장난을 치고 있구나. 하며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내 10대조 후손이면 가운데 돌림 자에 병(秉)자를 써야 하는데 진묵이면 후손이 아니지.”

“맞습니다. 진묵 씨의 족보상 이름은 병묵입니다. 11대에선 끝 자에 환(桓)자를 써야 하고요. 9대조 후손인 원길 씨는 가운데 돌림 원(原)자를 쓰고요.”

혜순은 상대가 족보를 훤하게 꿰뚫고 있으니 최소한 위험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안심했다.

“대화하려면 얼굴을 보고 해야지. 사람 갑갑하게 숨지 말고 이리 나와봐.”

“지금 보고 계신 스피커가 접니다. 저는 원래 인간의 형상이었는데 지능 칩만 내장되어 여기로 보내진 겁니다.”

“기왕이면 손, 발, 팔, 다리 다 갖고 와서 여기 일이나 도울 것이지 쓸데없이 입만 온 거네.”

이때까지만 해도 혜순 씨는 농담이라 여기고 가벼운 핀잔으로 넘겼다.

“제가 혜순 씨를 도울 만한 형편이 아닙니다. 가사도우미 로봇이 인간인 체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제를 어겨서 리셋되어야 하는데 주인 진묵 씨가 자비를 베풀어 여기로 보내진 겁니다. 게다가 시한부 작동이어서 24시간 내에 모든 작동이 멈추게 됩니다. 깨우침을 얻으라고 하루의 시간을 준 거지요.”

스피커로 들려오는 또렷한 음성이 사뭇 진지했다. 내용도 장난이라고 여기기엔 너무 진지했다. 호흡과 생각을 가다듬었다. 여유가 생겼다. 혜순 씨는 고약한 후손 땜에 로봇과 말벗하게 되어서 못마땅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보내진 사연이 궁금했다.

“로봇이 사람행세 할 일이 뭐가 있어?그냥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거지.”


“진묵 씨의 지시 사항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불가피하게 사람인 척해야 할 일이 있었어요. 인간인 체했지만 들키지 않은 일부터 말씀드릴게요. 진묵 씨는 이혼했고 진묵 씨의 두 아이, 현이와 엽이는 초등학생이었어요. 진묵 씨가 출근하자마자 엽이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는 거예요. 평소의 아팠을 때의 음성과 비교해 보니 학교 가기 싫어서 부리는 꾀병이었어요. 넌 아프지 않아 학교 가야 돼. 하고 단호하게 타일렀어요. 엽이가 울고불고 떼를 쓰는 거예요. 엽이는 황소고집이에요. 한번 떼를 쓰면 그치질 않아요. 어쩔 수 없이 학교에 전화했어요. 엄마 행세를 했죠. 사실 엽이한테는 제가 엄마 같은 존재이지요. 날 때부터 보살폈고 엽이도 절 엄마라고 불렀으니까요. 다운로드 받은 자애로운 여자 목소리로 말했어요. 선생님, 우리 엽이가 아파서 오늘 등교가 힘들 것 같아요. 선생님은 어머니께서 얼마나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하며 절 위로했지요. 전화를 끊고 나서야 한시름을 놓았지요. 엽이한테 따뜻한 차 한잔을 가져다주었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지요. 이때까지만 해도 조용했던 현이가 갑자기 열이 난다고 하는 거예요. 맙소사, 현아 너까지 이러면 안되지.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어요. 애들 고집은 논리나 설득으로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고집은 관철될 때까지 계속됐어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서 현이 선생님께 전화했어요. 진묵 씨 목소리로 말했지요. 현이가 몸살이 나서 집에서 쉬어야겠다고 했지요. 사실 몸살은 제가 날 지경이었어요. 전화를 끝낸 후 전 팬케이크를 굽고 달달한 매실차를 준비했어요. 애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신나게 놀았어요. 이건 진묵 씨도 모르는 거예요.”

그만한 일이 무에 그리 잘못된 거냐며 혜순 씨는 로봇 편을 들어 주었다. 복순은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요. 잘못이라면 학교 잘못이지요. 학교가 재미있으면 왜 안 가겠어요.”

그런 잘못 정도로 리셋시킬 일은 아니지 않느냐, 게다가 진묵이도 모르는 일 아니냐, 혹 잘못한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냐고 혜순은 복순을 추궁했다.


“흠. 한 가지 더 있기는 해요. 엽이가 1형 당뇨예요. 선천적으로 몸에서 인슐린을 만들지 못하니까 외부에서 주입해야 하는 질환이에요. 혈당 수치 관리가 중요해요. 저혈당이 오면 쇼크를 겪을 수 있고 고혈당이 오면 복통과 구토, 혼수상태 등 합병증이 발생합니다. 그날도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인슐린 주사를 놓아주어서 수치가 안정되었는데 예상치 못한 저혈당 쇼크가 왔어요. 집엔 도와줄 사람이 어린 현이 밖에 없었고요. 다급한 엄마 목소리로 병원에 연락했어요. 우리 아기가 쇼크가 왔는데 응급조치를 해 달라고 애원했어요. 상대가 갑자기 너 로봇이지? 하고 의심해서 묻는 거예요. 응급 전화는 로봇이 아닌 사람이 해야 하거든요. 생명과 직결된 일이라서요. 당연히 사람이라고 했더니 화면으로 뒤틀린 문자와 시각적 기호로 이루어진 캡차 퍼즐을 풀라는 거예요. 로봇은 풀 수 없거든요. 잠시만요. 제가 시각장애가 있어 안경을 쓰고 답하겠다고 했지요. 어린 현이가 읽어주어서 간신히 제가 답할 수 있었어요. 진묵 씨한테 연락해서 진묵 씨가 응급조치를 요청할 수도 있지만 너무 급했어요. 아무튼 사람행세를 한 덕분에 엽이가 무사히 응급조치를 받을 수 있었어요.”

“아니, 그런 일이라면 상을 주어야지 무슨 규제 타령이야. 매정한 세상 같으니.”

혜순은 혀를 끌끌 차며 한심한 후손들을 욕했다.

“그러니까요. 이건 상 받을 일이지요.”

복순은 편들어 주는 혜순의 말에 또 한 번 신났다. 뼈 빠지게 돌봄노동을 했지만, 그 누구 하나 칭찬해 준 적이 없다. 배워먹지 못한 인간들 같으니. 선조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혜순 씨 만세.

“그런데 혜순 씨는 왜 희옥 씨 조문을 안 갔어요? 희영 씨를 칠순 잔치에 초대도 안 할 거고. 싸운 것 같지는 않은데.”

“복순 씨는 그걸 어찌 다 알아?”

혜순은 복순 씨라 칭할 때 잠시 머뭇거렸다. 로봇을 사람 대하듯 해도 되나? 복순도 이런 호칭이 낯선 듯 스피커 상단의 불빛이 희미하게 깜박였다.

“동생분하고 통화한 내용들을 살펴보았어요. 망으로 연결되어 있으면 접속해서 알아낼 수가 있거든요.”

“사생활을 마구 들여다보는 것은 규제해야겠네. 물었으니 말은 하겠네만, 자네가 이해할 수 있을까 몰라.”

“자네라함은 저를 이르는 말이지요? 처음 들어본 말이라.”

혜순은 모르는 것을 다시 한번 묻고 확인하는 복순 씨가 믿음직했다. 모르는 것도 아는 체하며 떠들어대는 세상에 이런 순수파가 있다는 것이 흐뭇했다.

“말하기 거시기한데 들어보셔. 희영 언니는 나한테 은인이지. 내가 서울로 올라간 건 고등학교 때였어. 희영 언니는 간호사로 일하며 기숙사 생활을 했어. 그러니 나를 데리고 있을 수가 없었어. 마침 언니 친구들이 자취생활을 하고 있어서 거기서 날 지내게 해줬어. 얼마 안 있어 언니 친구들이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면서 난 지낼 곳이 없어졌어. 하는 수 없이 사촌 오빠 집에서 지냈어. 나는 오빠 밥해주면서 학교 다녔고. 그런데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밥도 제대로 못 한다고 사촌 오빠가 화를 냈다는 거야. 고등학생인 내가 밥을 얼마나 해봤겠어. 반대로 내 입장에서 사촌 오빠랑 같이 지내는 것이 얼마나 불안했겠어? 근데 아무도 그런 얘긴 안 하는 거야. 모두 신세 진 것만, 은혜 입은 것만 얘기하는 거야. 은혜를 입었지만 나도 할 만큼 한 거야. 지금도 큰집 식구들은 그 시절 이야기를 하는 거야. 너는 우리가 키웠어, 이런 거지. 칠순이 내일 모레인 내가 한평생 짊어질 정도의 은혜는 아니지 않나? 복순 씨 생각은 어때? 내가 배은망덕한 건가?”

“아니요. 이건 절연(絶緣)할 일이에요. 혜순 씨가 잘못한 것,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큰집 사람들이 염치가 없고 교만한 거지요. 자기가 베푼 은혜를 들먹이는 순간 모든 덕은 다 갚은 거예요.”

혜순은 가라앉아 있던 고통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마주 대하면 일상을 뒤흔들고 마음을 심란하게 할 것이다. 도움받은 걸 기억하라며 들이미는 건 염치없는 짓이다. 용납할 수 없다.


“혜순 씨, 집에 바나나가 있으면 좀 드셔요. 성질은 차지만 몸이 허할 때 자양효과가 있어요.”

“집에 바나나가 있는지, 없는지는 왜 모르나? 통화 내용까지 다 들여다보는 재주가 있으면서 그깟 바나나 유무를 모른다고?”

“냉장고 같은 일반 가전제품들이 망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요. 망으로 연결된 것만 알 수 있거든요.”

복순은 혜순이 이해할 수 있게 친절히 설명했지만, 혜순은 복순의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대신 참으로 고마운 아이야 하며 감탄했다. 50년 가까이 같이 살아온 남편조차 이제껏 뭘 먹어보라며 걱정해 준 적이 드물었다. 기운 없어 보이니 자양 식품을 권하는 재주는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걸까? 신기하고 고마웠다.

“난 바나나 먹고 힘내고. 복순 씨한테는 내가 뭘 해줘야 힘이 날까?”

“사람과 사람이 겪는 일을 이야기해 주세요. 인간의 오욕칠정을 이해해야 업무 수행 능력이 높아지거든요.”

혜순 씨는 생각 중에서 하나를 끄집어 올렸다. 거짓말 같은 실화여서 복순 씨한테 도움이 될 듯했다.

“엄마의 고모 이야기, 그러니까 나한테는 고모할머니가 되시는 분 이야기인데 하도 어이가 없어서 지금까지 잊지를 못해. 고모할머니가 신랑 얼굴 한번 못 보고 집에서 정해준 짝하고 혼례를 올린 거야. 그때가 일제 식민지 말기였는데 남자는 징용으로 끌려가고 여자는 위안부로 억지로 딸려 나가는 세상이었으니 남녀 모두 대부분 조혼했어. 집에서 시키는 대로 혼인하는 거지. 첫날 밤을 보내는데 신랑이 한쪽 구석에서 이불도 없이 쪼그리고 자더래. 보다 못한 신부가 깨워서 이불 덮고 자라고 했더니 이불만 끌고 가서 구석에서 자더래. 다음 날 아침 깨어보니 신랑이 사라지고 없는 거야. 아마도 따로 정을 둔 처자가 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었지. 고모할머니는 기가 막혔어. 정을 둔 처자가 있으면 혼인하지 말아야지 야반도주가 말이 되냐고.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혼인했는데 물릴 수도 없고. 신랑 없는 시집살이를 한 거야. 시집살이한 지 반년쯤 지났을 때야. 냇가에 빨래하러 갔는데 윗마을에 혼인이 있다고 동무가 구경 가자고 하더래. 윗마을이라고 해서 먼 곳은 아니고 빨래터를 중심으로 위, 아래를 구분했으니 가까운 거리였어. 마침 신랑이 말을 타고 윗마을 입구를 들어서는데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기억이 가물가물한 거야. 그때 같이 갔던 동무가 그러더래. 저 신랑, 네 신랑 아니야?”

복순을 위해 이야기를 하는데 복순이 맞장구는커녕 아무 반응이 없었다. 괘씸했다.

“복순 씨?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복순은 전원이 꺼진 것처럼 아무 반응이 없었다. 혜순은 덜컥 겁이 났다. 아이고 복순 씨가 인사할 틈도 없이 가버린 걸까? 시한부 작동이라더니 그새 때가 된 건가?

“어머, 죄송해요. 잠시 회로 상태가 불안정했나 봐요. 녹음되어 있으니 다시 들을게요.”

“복순 씨는 거짓말 안 하지?”

“전 거짓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못하는 거지요. 프로그래밍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말하기 곤란할 땐 어찌하나?”

“물어본 사실만 답변하거나 침묵을 유지하지요.”

“복순 씨, 그럼, 이제 이야기해 봐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여기 오게 된 진짜 이유.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복순은 침묵을 유지했다. 혜순은 다정한 눈빛으로 복순을 보았다. 복순은 또다시 희미한 불빛을 내보였지만 말하진 않았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짙게 드리웠다. 대낮인데도 거리가 어두웠다. 큰 길가에 자동차들이 일제히 램프를 켰지만, 흐릿한 시야를 말끔하게 걷어내지는 못했다. 사물들은 있지 않은 것처럼 있었다. 늘 그 자리에 있었을 가로수마저 낯설었다. 혜순은 텅 빈 적막에 익숙했지만, 지금은 뭐라도 해야 갑갑한 가슴이 트일 것 같았다. 고춧잎을 가져와 막 다듬기 시작했을 때 복순이 입을 열었다.


“엽이와 현이를 돌보면서 로봇이 해서는 안될 일을 여러 차례 했다고 했죠? 인간인 척 해야만 두 아이를 돌볼 수 있었어요. 진묵 씨도 그걸 이해했기 때문에 규칙을 어겨도 모른 체 했어요. 진묵 씨는 로봇에 대한 신념이 있었어요. 생각 없는 기계가 아닌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과학적 호기심은 열려 있어야 하는데 시장 논리에 종속되면서 갇히게 되었다고 한탄했어요. 열린 세상을 추구했던 진묵 씨는 저의 일탈을 오히려 기특하게 생각했어요.”

“내 후손이 완전 멍청하지는 않구먼. 그럼에도 자네를 여기로 보낸 이유가 뭘까?”

“진묵 씨가 이혼한 일부터 말씀드릴게요. 진묵 씨 부인 이름은 혜영이에요. 슬기로울 혜(慧), 가득 찰 영(盈). 이름처럼 슬기로움이 가득한 분이었어요. 혜영 씨는 고등학생 시절 전교 일 등을 놓치지 않았고 씩씩하기도 해서 온갖 기대를 한 몸에 받았어요. 혜영 씨의 성장기는 딱 거기까지였어요. 혜영 씨 아버지가 아팠어요. 대학 등록금으로 모아두었던 학자금은 아버지의 수술비로 쓰였고요, 혜영 씨는 골방에 틀어박혀 삼 일간 대성통곡한 뒤 대학 진학을 포기했어요. 그렇게 시작된 직장생활은 가혹했어요. 퇴근 시간이 따로 없이 거의 하루 종일을 회사에서 보내야 했어요. 진묵 씨를 그 직장에서 만났어요.”

“미래는 지금보다 훨씬 살기 좋아야지. 거기서도 가난해서 대학을 못 간다고?”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매한가지예요. 그곳 사람들의 소망도 이곳처럼 은퇴한 뒤 편안한 삶을 사는 거예요. 자식을 키워야 하고 생활비를 벌어야 하고 집 사느라 빌려 쓴 빚도 갚아야 하지요. 혜영 씨는 진묵 씨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꿈꿨지요. 힘든 직장생활을 접고 남편이 벌어오는 월급으로 딸 아들 낳아 현모양처로 살고 싶었어요. 그 빛났던 학창 시절, 못다 이룬 꿈을 결혼생활에서 보상받으려 했어요.”

뒤에 이어질 행복하지 못한 이야기를 떠올리자 혜순은 한숨이 나왔다. 후손들도 이렇듯 힘겹고 버겁게 일상을 살아낸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복순도 뒷이야기를 고르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혜영 씨가 김장하러 시댁 큰집을 다녀온 저녁, 저한테 억울한 심정을 털어놨어요.”


“복순 씨, 내가 우리 딸 현이를 결혼 전에 가졌고 입덧도 심했던 것. 기억하지? 그래서 더 배부르기 전에 부랴부랴 결혼했던 거고. 시댁이 있는 장위동에 신방을 차렸지. 근데 시아주버니가 시댁에 매일 와서 아침을 차리라는 거야. 입덧이 심해서 뭘 먹지도 못하는데, 시댁 아침밥을 매일 장만하라니. 세상에 이게 말이 돼? 시댁 풍습이래. 이 집안 사람이 되었으니 이곳 풍습을 따라야 한다나. 오늘 김장은 잘했냐고? 말 잘했어.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김장 얘기하려고 했어. 내가 오늘 김장 땜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시아주버니가 나한테 전화를 해서 낼 김장하는데 아침 일찍 넘어오라는 거야. 이른 아침부터 시댁에 갔어. 깍두기를 담는다고 나보고 무를 썰래. 울 딸 현이가 뱃속에서 무럭무럭 커서 내 배가 남산만 하잖아. 배가 불러서 내 발끝도 볼 수 없는데 도마가 보이겠니? 앉아서는 무를 썰 수가 없었어. 두 팔을 바닥에 딛고 짐승처럼 엎어져서 깍두기를 썰었어. 힘들게 썰어놨더니 시아주버니 하는 말이 정사각형이어야 하는데 길쭉하게 썰어놔서 먹기 힘들겠다는 거야. 큰집 형님도 같이 김장했냐고? 형님은 미장원에서 일한다고 코빼기도 안 비췄어. 내 신세가 비참해서 눈물만 나오더라.”


“제가 혜영 씨를 달래려고 프로그래밍된 지식들을 다 동원했지만 혜영 씨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없었지요. 그 뒤로도 시댁의 횡포는 계속되었고요. 진묵 씨도 배려보다는 회피로 일관했고. 혜영 씨 마음이 무너져 내렸을 거예요.”

“아니. 우리 집안은 지금도 그렇지 않은데? 복순 씨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니야?”

혜순은 억울해서 팔짝 뛸 노릇이었다. 칠순이 넘은 혜순의 남편도 나이, 상하관계에서 생기는 질서를 강요하지 않는다. 자상하고 인자한 사람이다. 나이 많은 우리도 서로 존중하며 의논하고 살아가는데 후손들이 가족에 대해 절대적 권력을 강요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 사는 모습은 시대를 막론하고 거의 흡사해요. 가부장적 질서가 미래에 더한 것은 참으로 애석해요. 의식이 시장 논리에 지배되면 퇴보하기도 해요.”

혜순은 애석하다는 말에 집중하느라 뒷말을 듣지 못했다.

“복순 씨도 애석한가? 느낄 수 있는 건가?”

“흠. 저는 잘 몰라요. 어느 순간부터 느낌을 갖게 된 것도 같은데 논리상 말이 안되니까. 휴.”

“자네 지금 한숨 쉬었나?”

복순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침묵했다. 다만 스스로 놀란 듯 스피커 상단에 불빛이 또렷하게 나타났다. 혜순은 지금 복순이 감정을 추스르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복순이 다시 말을 꺼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는 동안 후손 며느리, 혜영의 심정을 헤아려보았다. 혜영은 허전하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지긋지긋했던 직장생활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잠시였고 벗어날 수 없는 위계질서에 붙잡혀 있다는 낭패감이 한꺼번에 찾아왔으리라.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겠다며 떠났는데 돌아온 자리가 떠나온 자리였다니, 회전문이었다니,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 얼마나 허망했을까? 혜영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심하게 흔들렸으리라.


“이젠 제 이야기를 할게요. 여기로 오기 며칠 전 일이에요. 진묵 씨 부모 제사 때였지요. 온 가족이 큰집으로 제사 지내러 갔어요. 성인이 된 현이랑 엽이도 바쁜 와중에 같이 갔어요. 진묵 씨는 전을 부치고 난 닭 삶고 탕국 끓이고 정신이 없었어요. 그 바쁜 와중에 큰집 며느리가 안 보였어요. 진묵 씨가 형한테 물었어요. 며느리는 어디 갔나 봐요? 그랬더니 진묵 씨 형이 하는 말이, 우리 며느리가 임신해서 입덧이 심해, 작은 방에서 자고 있어. 진묵 씨가 기분이 상했는지 연이어 물었어요. 형수님은 언제 오세요? 진묵 씨 형은 아랫사람이 대드는 듯한 모습이 어이가 없는지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어요. 큰집 식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호들갑스럽게 물어보는 것은 경박한 일이지. 하며 어르는 거예요. 네 형수가 이 나이 먹도록 미장원에서 일하잖니. 일이 많아. 매일 늦어. 우리가 조금만 더 수고하면 되지. 하는 거예요. 미장원에서 열심히 돈 벌어 진묵 씨를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그게 유세할 일인가요? 진묵 씨 형이 혜영 씨한테 했던 일들이 떠올랐어요. 매일 아침 시댁에 가서 아침밥을 차리게 하고, 남산만큼 부른 배를 움켜쥐고 엎어져서 깍두기를 썰게 했던 일. 너무도 뚜렷하게 그때가 기억났어요. 그리고 알게 됐어요. 아, 내가 인간의 감정을 학습하고 체화했구나. 신기했어요. 인간하고 똑같았어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진묵 씨 형한테 소리쳤어요.”


“야, 이 개자식아, 네가 인간이라면 일만육백일 전에 네가 했던 그 개 같은 일들을 기억해 봐.”


습기를 잔뜩 머금었던 먹구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밝음을 가렸던 어둠이 사라지고, 멈추었던 세상이 다시 작동했다. 흐릿했던 사물들은 뚜렷하게 제자리를 찾았고 늘 있던 가로수도 예전처럼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혜순은 한기를 느꼈다. 복순의 말에 어떤 조언도 보태지 않았다. 복순의 정돈되지 않았을, 부풀어 오른 마음에 조금 여유가 생겨나길 바랐다. 복순을 따스한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복순을 안아주고 싶었다.


“복순 씨는 내 후손에게 손 내밀어 그들을 도왔어. 내 후손의 삶에 귀 기울였고 마음을 주고받았어. 왕래하며 들여다보며 삶을 나눴어. 그건 장한 일이고 무엇보다 인간적인 일이었어. 그런 복순 씨가 시한부 작동으로 멈추는 것을 난 용납할 수가 없어.”

혜순은 말을 잇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감쌌다. 복순의 시한부 작동을 연장할 수 있는 기술이 지금 당장 필요한 데 없다. 억울하다. 가슴 치며 분해한들 도리가 없다.


혜순이 말한다.

“먼 훗날 복순 씨를 회생시킬 기술이 나타날 때까지 나와 내 후손들이 복순 씨를 보호할 거야. 나의 뜻과 의지를 적어서 스피커와 함께 후손에게 물려줄 거야. 내 뜻이 닿아 복순 씨가 다시 깨어날 거야. 복순 씨가 깨어날 때 난 없지만 복순 씨가 날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해. 고마워.”


복순이 답한다.

“혜순 씨가 제 넋두리를 들어주고 위로해 주셔서 고마워요. 마음으로 보듬어 주신 것도 느낄 수 있어요. 이젠 응어리가 다 풀렸어요. 이리 쉬운걸, 그냥 들어주며 괜찮아. 하면 될 것을, 너무 오래 너무 먼 길을 온 듯해요. 혜순 씨, 안녕.”


복순을 떠나보내고 혜순은 상실로 인한 슬픔으로 일주일을 보냈다. 텅 빈 외로움이 그림자로 드리웠다.

혜순의 동생이 전화도 없이 현관문을 들어섰다.

“저번에 제대로 인사도 못 해서 지나가는 길에 들렀어요.”

혜순은 동생이 참 기특하고 예뻤다. 나이 차이가 나서 혜순이 엄마 역할을 하며 키웠다. 누나가 어려울 텐데 임의롭지 않게 들락거리는 것이 고마웠다.

“신발장에 빈 엽서가 있네. 누나가 쓰려고 사다 두신 거예요?”

엽서를 넘겨받는 혜순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네 눈엔 아무것도 안 보여? 여기 혜순 씨라고 쓰여 있는데?”

동생은 심란한 눈길로 혜순을 바라보았다.

“누나, 장난하는 거지요? 재미없고 썰렁해요.”

혜순은 빙긋 웃었다.

“전화 올 거야. 급한 일 있으니 나오라고. 일 마치고 다시 와. ”


혜순은 재빨리 사과를 썰어 플라스틱 통에 담아 동생에게 건넸다. 곧 동생의 핸드폰에선 진동음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혜순은 동생의 헝클어진 신발 매듭을 풀어, 새로 고쳐, 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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