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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환 Sep 05. 2023

하나도 안 변했네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엉뚱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학생 여러분.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무슨 질문이든 서슴없이 하세요. 내 성심성의껏 아는 대로 대답하겠습니다.”

“선생님. 질문 있습니다. 달이 두 개로 보인 적이 있으십니까?”

“이리 나오세요. 이리로 나오세요. 어서 나오세요. 어서. 이 소중한 시간에 쓸데없는 질문이나 하고. 양팔 들고 서 있어요.”


학기가 끝날 때 이런 조언도 했다.

“여러분. 인생 깁니다. 서두르지 말고 경거망동을 경계하세요. 혹 여자친구가 있다면 꼭 사인을 받아두세요. 지금은 그 친구가 만만해 보이지만 훗날 어른이 되었을 땐 만나기도 힘든 훌륭한 분이 돼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분은 여러분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어요.”


 나는 담임 선생님의 조언을 깊이 새겨들었을 뿐만 아니라 실천했다. 내가 좋아했던 같은 반 여자아이가 있었다. 나 뿐 아니라 아이들 대부분이 좋아했던 아이였다. 얼굴 예쁘고, 공부 잘해서 선생님한테 귀염받으며, 모든 아이들한테 차별 없이 친절한 아이였다. 여자아이는 나에게도 다른 아이들한테 그러하듯 친절했고 다정다감했으며 깊은 배려심을 나타냈다. 나 역시 모든 아이들이 그러하듯 그 아이가 나를 좋아한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아주 가끔 꿈에도 나타나 가슴 설레게 하는 그런 여자아이였다.


 전화가 귀했던 시절이라 학급별로 비상 연락망을 갖추었다. 연락망이 제대로 가동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학교에선 방과 후에 느닷없이 이런 전언을 넣었다. ‘내일 미술 시간에 수채화를 배울 테니 물감을 준비하시오.’ 반장은 비상 연락망을 통해 부반장한테 학교 전언을 전달했고 부반장은 정해진 순서에 의해 다음 사람에게 전달했다. 내가 전달할 다음 사람이 바로 내가 좋아했던 아이였다.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간 집은 이층 양옥이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친구라고 했다. 대문이 열리고 여자아이가 나왔다. 가슴이 두근거려 어지러웠다.


“고마워. 낼 꼭 물감 챙겨갈게. 네 집이 꽤 멀던데 돌아가려면 힘들겠다.”

“우리 집을 알아?”

“전에 비 오는 날. 내가 네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잖아. 네가 우산이 없어서. 그래서

알았지.”순간 담임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부탁 하나 할게. 여기 이 노트에 이름 쓰고 사인하나 해줄래?”

여자아이는 의아한 듯 쳐다봤지만 왜 사인을 해 달라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사인 대신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써 주었다.

                                           *


삼십 년이란 세월이 소리도 없이, 가뭇없이 흘렀다. 신문 기사를 읽다가 많이 들어본 익숙한 이름과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김혜련. 누구더라 분명히 본 적이 있는 얼굴인데”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어도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동창인 듯해서 졸업앨범을 뒤졌다. 앨범에서 종이 한 장이 빠져나왔다. 그 종이엔 정자체로 ‘김혜련’이라고 적혀 있었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대형서점에서 치러진 저자와의 만남은 많은 인파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저자의 사인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섰다. 마침내 차례가 되었다. 그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지러웠다.

“작가님 사인은 이미 오래전에 받았습니다. 제가 그 사인을 보여드려도 될까요?”

그녀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고 그녀는 그 종이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야. 나덕주. 하나도 안 변했네. 어쩜 이리 그대로니? 사인회 끝날 때까지 잠깐만 기다려. 널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 네가 나 좋아한 것, 그때도 다 알고 있었거든. 넌 지지리도 눈치가 없더라. 나도 널 좋아했는데. 결혼은 했니? 아이가 둘이라고. 그럼 이혼하고 나랑 같이 살면서 애 둘 키우면 되겠네. 흐흐흐.”

“나 떨고 있니?”


수 십년 전 선생님의 권면은 비록 진정성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훗날 우리가 만날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임은 틀림없다. 기억 저편 깊이 묻혀 있던 편린을 퍼 올려 어렵게 끼워 맞춰 퍼즐을 완성했다.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된다는 믿음은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한다. 만남을 위해선 중요한 단서라도 남겨 두어야 한다. 그저 간절히 기다린다고 이뤄지는 만남은 없다. 맑은 바람이 기분 좋게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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