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도 장마대비란 걸 할 수 있었으면
일기예보 달력에 우산이 주렁주렁 달려있습니다. 당장 코앞의 일요일부터 다음 주 토요일까지 비 소식이 빼곡하기도 합니다. 풍문으로 들었소, 제주도 태풍이 그렇게 매섭다던데, 제주도에서의 장마는 또 얼마나 살벌할까요. 일찍이 5월 즈음, 제주에 입도하고 처음 겪은 봄비, 그 서정적인 어감이 무색하게 폭풍이 섬을 뒤흔드는 것을 겪었습니다. 혹독하게 ‘바람섬’의 악명을 맛본 터라 태풍이나, 장마 같은 악천후 예보에 미리부터 잔뜩 겁을 집어삼켰습니다.
특히나 올해는 4년 만의 귀환, ‘슈퍼 엘리뇨’가 예상되는 해였습니다. 기상이변으로 인해 7월엔 5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날이 비가 내린다는 장마괴담이 일찍부터 흉흉했습니다. 때문에 세상은 출렁출렁 잔물결이 소란합니다. 부지런한 투자자들은 일찍부터 농산물 관련 투자상품(ETF, ETN)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보험사들은 사고에 대비해 손해율을 다시 저울질합니다. 그러나 항상 세상의 움직임보다 한 템포 굼뜬 우리 가족. 저희 집은 제주도 이사할 때 세간 살림을 최대한 간소하게 했었기에, 장마를 대비할 이렇다 할 대비책이 없었습니다. 기본적인 구색이라도 갖춰야 할 것이 많아 마음만 조급했습니다.
0. 사전준비. 제습기는 여름철 필수품
저희 동네 삼양동은 검은 모래해변에 접하는 경사면을 따라 조성된 마을입니다. 파도를 타고 먼데서부터 바람이 불어 들면 공기에 바닷물이 촉촉이 실려 옵니다. 그것도 낭만이라면 낭만이지만, 현실은 또 냉정합니다. 제주도 여름은 가히 습도와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토박이 도민들이 돌아가며 재차 삼차 주의를 주었습니다, 습도를 만만히 봐선 큰코다친다고요.
“자칫 관리를 소홀히 하면 옷이며 가방이며 곰팡이의 놀이터가 되기 십상입니다.”
우리 집 안방 샤넬 자매님들과 루이뷔통 형제님들을 지키기 위해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필요한 건 최신형 습도방어체계! 바로 구축에 돌입합니다. 제습기(62만 9천 원), 덩달아 신형 선풍기(11만 9천 원)도 든든하게 업어왔습니다. 제습기 시범운전을 해보니 기존 실내습도가 70%에서 50%으로 떨어지며 순식간에 공기가 뽀송해집니다. 집 전체는 커버가 힘들지 몰라도 방 한 칸 정도는 쾌적함을 유지하기에 든든합니다. 온도계 빵긋 웃습니다.
일요일 저녁, 제주에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세 식구가 영화 ‘엘리멘탈’ 보고 돌아가는 길목, 뜻밖에 이른 폭우를 만난 겁니다. 차량 와이퍼가 살풀이를 하듯 바삐 춤을 추는 대도 시야확보가 안 될 정도였습니다. 이쯤 되니 정말 한 주간 내내 지루하게 지속될 장마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지요. 뉴스방송을 통해서는 벌써 “자동기상관측장비(AWS)에 따르면 한라산(진달래밭)에 최고 225mm 비소식”이라느니, “나무가 쓰러졌다는 신고도 2건이나 접수 됐다.”는 소식이 요란합니다. 장마여, 부디 무사히 잘 지나가기를!
월요일입니다. 아침까지 비가 내리더니 점심을 먹을 즈음, ‘어라? 날씨가 화창하네!’
베란다를 열어보니 잠깐 고개를 내민 땡볕에 주차장 바닥 물기가 말라있습니다. 날씨예보를 확인해 보니 오늘 밤 9시경 까진 잠깐 맑을 거라고 합니다. 이른바 ‘타임찬스!’ 본격적으로 이어지는 비 예보 이전에 잠깐의 소강상태를 맞이한 겁니다. 이때다, 싶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건 단 몇 시간! 서둘러 마지막 벼락치기를 부랴부랴 준비해 봅니다.
1. 막아라! 축축함으로부터 발끝을 지키는 신발구매
장마철 주목받는 패션아이템 중 단연 가장 주목받는 것이 신발류입니다. 이사를 오면서 신발정리를 대거 감행한 탓에 마땅히 ‘장마대비템’이랄 게 없었는데 이참에 벼르던 크록스를 구매했습니다. 요즘 핫한 레인부츠(장화)를 살까도 고민했지만 코디를 예쁘게 할 자신이 없어 국민템으로 떠오른 크록스를 무난하게 골랐습니다. 크록스 만으로도 물 텀벙, 골목길 야트막한 침수대비는 거뜬합니다. 식구들 취향과 선호를 반영하여 세 켤레를 바삐 구매했는데, 급하게 사놓고 보니 가족으로서의 통일감은 제로였습니다. 아무렴 어떠랴, 각자의 방식으로 퍼붓는 비를 맨발로 맞서보기로 합니다.
2. 유지하라! 임산부 체중관리를 위한 마지막 몸부림
비가 오면 꼼짝없이 무기력하게 실내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얼마 전부터 임신으로 불어난 몸무게를 관리하고자 ‘데일리 미션, 하루 만보 걷기’를 선언했는데 장마로 인해 일시중단할 상황이었습니다. 뜻밖의 횡재, 타임찬스를 맞이하여 광합성도 하고 비타민D를 보충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습니다. 함덕까지 이어지는 산책코스를 걸어보니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산책 동지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들어냅니다. 천천히 그들과 보폭을 맞춰봅니다. 약, 13,000보. 운동도 선결제를 했습니다.
3. 즐겨라! 장마를 풍류로 활용할 비장의 무기
‘비 오는 날 최고의 즐거움은 뭐다? 파전에 칼국수다!’
문득 잠시 허락된 타임찬스기간 동안 무엇을 또 준비해야 할지 골몰하다 보니 전광석화처럼 떠오른 아이디어입니다. 냉장고를 확인해 보니 비루한 살림살이가 여실합니다. 파전은커녕 김치전도 못할 판입니다. 저녁을 먹으러 나가면서 마트에 들러 '부침가루', '부추', '오징어'를 구매했습니다. 냉장고 채워 넣으니 그렇게 든든할 수 없습니다. 빗소리 자작해지면 '오징어 부추전' 부침반죽을 프라이팬에 올려놓고 화음을 쌓을 겁니다. ‘덤벼라 장마야, 즐겁게 맞이해 주마!’
이렇게 차곡차곡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소파에 누워봅니다. 낯 빛 어두운 구름이 조금씩 가까이 온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제 곧 빗방울이 내릴 테지요. 그러고 보면 문득 삶에도 오늘과 같은 '타임찬스'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미리 위기상황을 준비할 수 있는 소강의 시간 말입니다. 잠깐의 시간이라도 좋습니다. 미리 제방도 쌓고, 배수시설도 점검하고, 마음의 그루터기도 다져놓으면 아무리 버거운 상황도 무던히 넘길 수 있는 체력이 생기지 않을까요. 어떤 집중호우라도 파전을 먹으며 여유롭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