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 사냥법 근황
‘맹호처럼 또는 들개처럼’ 감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워봅니다. 글감을 향해 포복자세를 취하고 은신 접근하여 표적을 정확하게 포착, 여기 이 백지에 데려다 놓고 싶습니다. 쏟아지는 정보 속 가치 있고 매력적인 소재를 여과 없이 흡입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초보 글감 사냥꾼은 매번 난감합니다. 내 표적이 과연 어디인지 감도 없습니다.
수려한 필력과 예리한 통찰술 등 화려한 문예기술을 펼쳐내는 '글잡이의 뒤꽁무니'라도 쫓아보려는 욕심이 들고부터 생긴 고민입니다. 도대체 난 뭘 써야 할까요? 작가님들의 글은 저리도 말끔하고 세련되었는데, 내가 건져 올린 글들은 남루하고 초라해 보입니다. 월척을 꿈꾸고 낚싯대를 던져보지만 제가 건져 올린 글감, 소재는 몸집이 작아 매번 방류행입니다.
은유작가님은 <쓰기의 말들>에서 ‘하늘은 관대하나 화면은 단호하다. 이제 여기에다 무엇을 쓸 거냐고 노려보는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브런치 작가심사도 한참 전에 통과되었고 뭔가 쓰고 싶긴 한 것 같은데, 무엇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엄청난 고민이 있었습니다. 난 이혼의 경험도, 해외체류도 안 했는데 평범한 인생도 원망해 봅니다. 자구책으로 글쓰기 서적을 최근 탐독하고 강의도 찾아들어봤습니다. 그러니 조금은 알겠더라고요. ‘무엇을 쓸 거냐?’는 문제는 활자를 찍어내는 이들의 공통되고, 고전적인 고민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작문이란 문 앞에서 가장 먼저 직면하는 물음표이지만, 가장 후순위의 문제라는 걸요.
하지만, 그래도 고민인 건 사실입니다. 사춘기 소녀의 연애상담을 하찮게 취급하면, 억울하고 서운해하는 것처럼요. 저처럼 글쓰기를 수련하는 누군가에겐 한숨 나오는 절절한 고민일 수 있잖아요. 그래서, 함께 고민하는 문우동지들을 위해 개똥철학이지만 그간 전문가 자문도 얻어 보고, 경험도 해보고 고민해 본 나름의 수기를 공유해보려 합니다.
① 콜렉팅(Collecting), 일상에서 낚아내기
소설가 길버트 카스 체스터턴는 “세상에 재미없는 주제란 없다. 무심한 인간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어령 작가님은 <우리 문화 박물지>에서 우리 전통에 숨은 사소한 물건에서 의미를 길러냈습니다. ‘매듭: 맺고 푸는 선의 드라마’, ‘박: 초가지붕 위의 마술사’라고요. 매듭, 박에게서 새로운 의미와 세계를 재창조합니다. 대단합니다.
최근으로 넘어가 김이나 작사가의 <보통의 언어들>을 보면, 우리가 늘 쓰는 ‘사과하다’라는 말에서 사과를 받는 쪽에서 필요한 겸연쩍은 시간이란 게 있다는 통찰을 끄집어냅니다. 이외에도 묻다, 소란스럽다, 간지럽다는 언어가 김이나 님의 맛 좋은 글 소재입니다.
이렇듯 글감이 무엇(What)인지 보다 이를 바라보는 시선(How)이 진정 중요한 문제였던 겁니다.
요즘은 딸아이와 손잡고 하원하며 나눈 대화, 남편이 야식으로 찜기에 준비해 둔 초당옥수수, 마을 어귀에 자리한 사연 있는 당산(堂山) 나무까지. 일상을 살면서 지나온 시간의 결이 사랑스러워 메모장에 갈무리해 두기 바쁜 요즘입니다. ‘글을 쓰고’부터 생긴 변화입니다. 이외에도 내 감정채집, 감정을 통과한 씨앗문장, 오늘의 처음 같이 내 삶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필력은 틈틈이 관찰해서 나온 코어근육에서 비롯된다고 하잖아요.
② 페잉(Paying), 강제로 무엇이든지 쓰게 하는 돈기부여
글감을 향한 ‘시선’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기에, 다음은 이 ‘시선’을 단련하여 글로 풀어내는 훈련을 했습니다. 약간의 ‘자본주의’의 힘을 빌려서요. 물론 이는 독학으로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돈기부여는 벽에 부딪히면 지레 포기하는 저의 만성체질에 따른 극약처방이었습니다. 그간 도전해 보았던 것은 아래와 같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 글 ego, 자아실현적 책 쓰기: 자유 주제로 긴 글을 쓰고 책을 편찬하는 시스템, 6주 후 마감
- 1막 1장, 한 달 에세이: 평일동안 카카오톡을 통해 글감제공, 매일 마감
(15회, 분량자율)
- 담해북스, 하루 3 문장 매일 쓰는 습관 키우기: 매일 이메일, 카카오톡을 통해 글감제공, 매일 마감
(21회, 500자 이내)
모두 강제로 마감을 부여하는 시스템이고 미션을 완수하고 나면 글을 묶어 그럴싸한 책자를 제공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글 ego는 자율주제이지만 나머지는 테마를 갖춘 랜덤 한 글감이 제공됩니다. 가끔은 생뚱맞은 글감이 내려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어진 글감을 어떻게든 활용하여 끝까지 글을 완성하는 훈련을 하는 데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매일 숙제를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지만, 글을 다 쓰면 이 부담은 보람이 됩니다. 보람은 다음 글을 쓰는 먹이가 되곤 하죠. 쥐어짜면 나오는 마법 같은 경험을 하기 좋았습니다.
③ 디깅(Digging), 한 가지 콘셉트로 파고들기
심화단계입니다. 고백컨데 아직 정복을 못한 영역입니다.
신은혜 작가님은 글쓰기와 책 쓰기의 기본차이는 ‘콘셉트의 유무’에 있다고 했습니다. 콘셉트가 있어야 거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를 불러올 수 있다고요. 기본적으로 브런치 스토리에서 제공하는 매거진이나 브런치북도 이런 한 가지 주제를 쓸 것을 지향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김신회 저)는 만화 보노보노의 대사라는 공통적인 글감을 활용해 책 한 권을 엮었습니다. <내일 쓰는 일기>(허은실 저)는 제주도의 일상이 글감입니다. 뭐든 심어놓으면 뿌리를 내리고 생각이 번진다는 걸 믿습니다. 당장 저만해도 브런치 스토리에 매거진을 만들어 놓고 보니 그에 대해서 뭘 쓸지 고민하다 보니 그럭저럭 글이 하나씩 나오더라고요.
수영을 배우면서 느낀 점, 일 년간 도전한 것들, 드라마 명대사, 게으른 나를 일으키는 소소한 것들 등등 하나의 주제로 약 20개의 글을 뽑아낼 수 있다면 그때는 정말 작가의 기본기를 갖추었다고 얘기해도 되지 않을까요. 아직 그 수준까진 글을 써내지 못했지만, 노력 중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행동하는 자만이 배우기 마련이다.”
어떤 글감이든 매일 반복해서 글을 쓰다 보면 반복은 리듬을 갖게 되고, 언젠가 어떤 경지를 향해 뻗어갈 것을 믿습니다. 그 첫걸음에서, ‘무엇을 쓰지?’를 고민하는 망설임에 제 고군분투기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