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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뭄씨 May 04. 2023

1주차. 떫은 이모티콘과 임테기

일 중독 워킹맘이 갑작스러운 휴직을 경험할 때 벌어지는 일



"콘텐츠 심사 결과를 알려드립니다.

아쉽게도 긍정적인 소식을 전해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




첫 번째 떫은, 네이버 이모티콘 승인거절


제목도 읽지 않고 무심결에 클릭한 메일에는 

며칠 전 심사신청을 넣었던 이모티콘 신청결과가 무심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승인반려'

활자가 따끔거리는 느낌은 취업준비생 시절 이후 실로 오랜만이었습니다. 

사실, 크게 미련 둘 것도 없는 거절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제주도 발령으로 느닷없이 시작한 나의 휴직에 그저 소일거리로 그려본 이모티콘이었으니까요. 생각해 보니, 그림을 그리는 동안 '우와, 나 소질 있는 거 아냐?' 라든가, '이대로 퇴사하고 갓생할 수 있을 것 같아!' 따위의 망상은 '감히' 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요, 늦었지만 고백컨데 기대감에 부풀어 기세등등하게 '두 개'나 제안해 보았더랍니다. 

설레발은 필패라더니. 



별 것 아닌 사건에도 불구하고, 별스럽게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왜냐하면 요 근래의 저는 외부자극을 쉽게 극복하지 못하고, 

내상 시 위중증 위험이 큰 이른바 '거절취약계층'이었거든요. 연이은 불운에 멘탈이 털릴대로 털린. 


부동산 경기가 휘청거리는 바람에 마른 수건 쥐어짜 내도 전셋값을 내어줄 수 있을지 불확실한 판이고, 

비자발적 경력단절을 경험해고 있으며, 

남편은 제주도에 집을 구하지 못해 주말부부로서 독박육아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한 때는 한 손에 아메리카노를 들고 광화문을 누비던 금융권 커리어우먼이었지만, 

정신 차려 보니 지금은 한 손에 낮잠이불을 들고 시골 어린이집을 누비는 휴직한 가정주부 신세이지 뭡니까. 

원래 맞은데 또 맞으면 더 아픕니다.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웃고 넘어갔을 테지만 오늘은 내 첫 이모티콘 '인턴앵커 주발랄씨'와 '뭉근한인생, 사과씨'가 슬퍼 보입니다. 






두 번째 떫은, 임신테스트기의 단호한 한 줄


사실, 꼬이는 일이 이것뿐이었다면 대차게 훌훌 털어버렸을 겁니다. 

전 뭐든지 극복할 수 있는 대한의 장녀거든요. 

무엇보다 저를 힘들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임신테스트기'였습니다. 


갑작스럽지만 우리 부부는 저의 휴직과 함께 둘째를 가져보면 어떨까 의기투합을 해본 찰나였습니다. 문득, 생리예정일이 다가오자 '혹시..'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알고 보니 '임신테스트기' 이 녀석은 임신 아닌 '연신'(연애의신)이었으며, 명실상부 '밀당의 고수'였으며, 역대급 금단현상을 가진 '마약'에 다름없었습니다. 


"오빠, 이거 두줄 같지 않아? 좀 있다 다시 해봐야 할 것 같아."

"분명 아까는 두줄이었는데, 이 제품은 반응이 느린 것 같아."


이렇게 배란 5일 차부터 11일 차까지 약 7일에 거쳐 쓴 임테기는 총 21개. 

21번이나 대차게 거절당한 셈이죠. '초 매직아이'로 은근하게 보이는 테스트선 때문에 태명까지 짓게 하더니, 다음날 야멸차게 한 줄을 보이며 상처를 주더라고요. 밤새 맘카페를 하루 5시간 넘게 쳐다보게 하는가 하면, 평범한 주부를 시약선 전문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시약선에 속고 단호박(임신테스트기의 한 줄 단호함을 맘카페에서 일컫는 말이라죠)에 울고. 


의아합니다. 분명, 합계출산율 0.81명인 시대에, 우리 부부가 '둘째'를 미친 듯 강하게 원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간 일 욕심, 일 핑계에 후순위로 둘째 계획을 미뤄두었다가, 반자발적으로 휴직한 김에 가족계획을 다시 세워보았던 것뿐이었습니다. 






익지 않은 땡감은 떫어서 먹지 못합니다. 


억울해서 가만히 생각해 봤습니다. 세상이 갑자기 나한테 권태기가 왔나? 

연이어 실망 만을 안겨주며 변해버린 나의 운빨에 괜히 심술이 났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제 맘속을 가만히 들어다 보니, '이모티콘'이든 갑작스러운 '둘째 계획'이든 절반의 책임은 내 마음속에 있지 않았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자 저는'쓸모'를 잃었다고 생각했거든요. 저의 의미를 찾기 위해 조급하게 성과를 독촉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감이 익기도 전에 땡감을 헐레벌떡 주워 먹었던 거 아닐까요? 


이모티콘도 달랑 일주일 만에 만들었던 거고, 아이도 배란일을 제대로 체크하는 노력 없이 첫째 때처럼 '한방'을 노렸습니다. 익지 않는 땡감은 떫어서 먹지도 못해요. 진지하게 '소망'하고, 시간을 들여 '성숙'시켜야 뭐든 일이 된다는 것을 서른이 넘도록 체득하지 못했군요, 나 자신.


최근 일본드라마 '롱베케이션(Long vacation, 1996)'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기무라 타쿠야의 데뷔 초 경이롭기까지 한 미모를 볼 수 있는 이 드라마는 사실 저에겐 '자양강장제'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씁쓸한 경험을 하고 난 이후 천천히 마음을 수습할 때마다 찾았거든요. 

"난 처량보단 고열량!" 닭볶음탕과 함께 드라마 속 대사를 되뇌며 힘을 내 봅니다. 


"하고 있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잘 풀리지 않을 때 

조급해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하늘이 준 긴 휴식이라고 생각해. 롱베케이션(long vacation)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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