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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뭄씨 May 05. 2023

4주차. 이토록 뜨거운 임테기(記) 블루스

둘째지만 임테기라는 마약에 중독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에겐 '한심'일 수 있지만, 

저에겐 눈물겨운 '활극'입니다.

320만 맘카페 회원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임신 준비과정을 그린 2주간의 대서사시이며 

'임신테스트기(이하 임테기)'가 촉발한 어둠과 환희의 기록입니다.

다소 호들갑스럽게 서술해서 죄송하긴 하지만, 

그만큼 저에겐 날카로운 첫 키스 마냥 강렬한 경험이었습니다.






어쩌면 임테기에 손댄 것부터가 글렀겠군요


남편을 군산공항에 배웅해 주고 돌아오는 길, 운전하는 내내 아랫배가 콕콕 쑤셨습니다. 

과식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설마 하니 임신인가?'

그러다 우연히, 낮은 hcg수치에도 반응하는 얼리임테기(일명 '얼테기')가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통상적으로 임신테스트기는 배란일로부터 약 14일 이후부터 사용을 권장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수정란이 착상이 되고 임신테스트기가 캐치할 만큼 농도 짙은 hcg 호르몬을 분비하기까지의 시간이 2주인 거죠. 근데 이 임테기 시장에도 과학기술의 발달로 낮은 hcg수치에도 반응하는 신통방통한 '얼테기'를 내놓은 겁니다. 


바야흐로 배란일 이후 9일~10일 만에 임신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겁니다. 

첫째 때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죠.


배란 6일째(추정) 날이었습니다.

아무리 '얼리(early)'라 하더라도 배란 6일 차엔 안보이거나 흐릴 것이라고, 

이성은 분명히 경고했었습니다.

그러나 지속되는 아랫배 통증에 호기심은 폭주기관차 마냥 내달렸습니다. 

맘카페에도 6일 차에 흐릿한 두줄을 영접한 선배 임신자들의 간증이 꽤 보이기도 했고요.


“나는 미술을 쫌 하니까!”

스스로 색상구분능력을 과신하고 '초초초매직아이'로라도 임신여부를 판별해 보이겠다며 

호기롭게 ‘쿠팡’으로 얼테기를 주문해 버립니다.

‘쿠팡’이 가진 인공지능 로봇을 탑재한 최신 유통물류시스템과 성실하고 신속 정확한 배송기사의 환상호흡으로 얼테기는 만 하루가 되지 않아 저희 집으로 도착합니다. 불운하게도.



결과는? 당연히 단호박.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아 아직 배란 6일 차니까!"





맘카페의 아침은 테스터 질문방으로 시작됩니다


‘배란 7일 차 테스트기 좀 봐주세요’

오늘도 저보다 먼저 일어나 임신여부를 판별한 분들이 작성한 게시물들로 새벽 맘카페는 아랫목이 뜨끈하게 데워져 있습니다, 이런 부지런한 사람들!

전 잠시 고민을 했습니다. ‘괜히 했다가 실망하면 오늘 하루 망치는데..’, ‘그래도 궁금한데...’

테스트를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제 맘속에  각축전이 벌어졌습니다.

어라! 근데 배란 7일 차에 연한 두줄을 본 사연을 발견합니다.

사실 정답은 정해져 있는 거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길로 일어나 한 손엔 테스트기, 한 손엔 종이컵을 들고 개선장군처럼 비정한 표정으로 화장실로 향합니다.


확인할 땐 손마저 덜덜 떨립니다.

결과는? 단호박...... 인가? 아니다, 오늘은 뭔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대조선 옆으로 그림자인지 아니면 나의 간절한 마음이 만들어낸 신기루 인지 모를 선 하나가 세로서 있습니다. 자, 이제 난데없이 그 새벽에 집안에 있는 모든 방 조명 아래를 순회하면서 눈 빠지게 테스트기를 쳐다보기 시작합니다.

“두줄인가? 아닌가?”


한참을 쳐다보면 분명히 희미한 두줄인 것 같습니다. 어디에선가 회색이면 시약선이고 붉은빛을 띠면 임신이 맞다고 하던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뿔싸!! 이제 붉은색으로 보일지경입니다. 

그렇습니다. 

생각만으로 우리의 뇌는 색상도 바꿔볼 수 있더라고요. 인체의 인비를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카메라 사진을 찍어 카페 맘들에게 여쭤보려 했는데 카메라를 들이대자 선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야 색안경이 벗겨지는 순간입니다. 이걸 그대로 올렸다가는 임신하고 싶어 헛것을 보는 짠한 글쓴이가 될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잠시 시간을 가지고 냉정을 되찾은 다음 다시 테스트기를 보기로 합니다.


“에이.. 뭐야.. 꽝이었네..”



그렇게...

배란 7일 차부터 12일 차까지 쓴 임테기는 총 스무 개 남짓. 

폭주에 가깝게 거의 요의가 느껴질 때마다 임신여부를 확인해 봅니다. 

이제는 임신보다는 두줄 자체에 도전한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젠 시약선을 구분해 내는 능력도 갖추었으며, 

동시에 내가 본 것은 헛것이었음을 가늠해 내는 혜안도 생겼습니다.

간절함이 지나쳐 테스터기를 너무 오래 적셔내면 시약선이 짙게 보여 자칫 속을 수 있습니다.

(동아제약 얼리임테기 기준) 

따라서, 포장에 적힌 안내서가 권장하는 3~10초를 준수하여 판별하도록 해야 하더라고요. 

그래도 아쉬움은 남아 ‘배란 13일 차 처음 두줄’ 따위를 애처롭게 검색을 해보지만, 

문득, 스스로가 딱해져서 이제까지 했던 임테기를 모조리 버렸습니다.






임테기 노예해방!.. 그리고 포기하니 찾아온 기적


오늘은 새벽에 일어나지 않았고, 아침 첫 일과를 테스터기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임테기 지옥에서 벗어나 오래간만에 '산뜻'하게 시작하는 아침이었네요.

가슴이 콕콕 찌릿찌릿한 증상이 있지만 이젠 속지 않기로 합니다.

아침부터 딸이 노래를 부르는 ‘스팸계란밥’을 해주기 위해 마트 장을 함께 보고 돌아왔습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능숙하고, 정확하게 주차를 하고 짐을 꺼내려던 순간! 딸이 물었습니다.


“엄마, 왜 동생자리에 짐을 뒀어?”    


순간 멈칫! 

우리 부부는 이제 막 6살이 되는 딸에게는 동생에 대한 계획을 얘긴 한 적이 없었거든요.

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음 달 전엔 임테기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지만, 엘리베이터를 오르는 동안 의구심은 왠지 모를 확신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임테기를 기다리는 시간. 더 이상 떨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시작된 임산부의 일상.

돌이켜 보면, 뭘 그렇게 유난스러웠나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요

두 줄을 바라며 임테기와 함께한 희망고문의 시간은 둘째에 대한 간절함과 감사함이 뒤섞인 일종의 모성애를 키워가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뭐...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윽고 나를 덮친 입덧지옥에

'내가 미쳤지! 둘째가 웬 말이야!' 하며 바로 태도를 바꿔 5G 속도로 땅을 치며 후회하긴 했지만...


뭐, 인생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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