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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석 더 프리맨 Aug 04. 2024

Bingo! 무더울 땐 역시 얼음

[푸드로지] 여름에 만나는 겨울 빙고(氷庫)에서 나온 빙수

팥고당 팥빙수


■ 이우석의 푸드로지 - 빙수

2000년전 신라때 빙고 만들어

여름 왕실·귀족에 얼음 나눠줘

조선시대엔 얼음 관장기관까지

얼음 잘게 부숴 과일과 먹기도

팥·멜론·초코과자… 재료 다양

여름철 ‘디저트 대명사’로 등극



본격적인 무더위 시즌이다. 체온이 올라가면 정온동물인 인간은 급격히 활동이 느려진다. 하루 종일 무기력하고 금세 지쳐버리는 데다 심하면 온열 질환에까지 이를 수 있다. 땀을 내는 이열치열(以熱治熱)도 이를 해소하는 과학적 방법이지만, 시원한 음료를 먹어 체온을 내릴 수도 있다. 예로부터 이런 원리를 알고 있었다. 물론 특정 권력 계층에게만 해당하는 일이었겠지만 그 옛날에도 여름에 얼음을 먹으며 더위를 피하고 건강을 챙긴 사례가 있었다. 지금도 유효하다. 무더위가 찾아왔지만 든든하다. 우리에겐 시원한 얼음을 갈아 마시는 음식 빙수(氷水)가 있으니까.


예전엔 왕후장상, 고관대작만 먹을 수 있던 ‘여름날의 얼음’을 이젠 누구나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바야흐로 도래한 빙수의 계절, 18세기 제빙기 발명에 의해 유래한 아이스크림보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태곳적 아이스크림’ 빙수의 세계로 안내한다.



도쿄빙수 ‘오레오 빙수’


4계절이 있어 연중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을 한 번씩 보내야 하는 기후에 살던 인류는 한겨울에 꽝꽝 언 얼음을 여름에 쓰기 위해 보존하고자 하는 꾀를 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바로 얼음창고, ‘빙고(氷庫)’다. 외기를 차단한 서늘한 장소에선 여름까지 얼음을 어느 정도 남겨둘 수 있었으니 훌륭한 아이디어였다.

빙고(BINGO!)


삼국시대 초기에도 빙고를 설치했다. 무려 2000여 년 전이다. 신라 유리왕 5년(AD 28년)에 장빙고를 지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참고로 신라의 유리 이사금은 ‘펄펄 나는 저 꾀꼬리’로 시작하는 황조가의 주인공인 ‘로맨티스트’ 고구려 유리왕과는 다른 인물이다. 삼국사기에도 505년 신라 지증왕이 얼음을 저장하라는 명을 했음을 기록으로 남겼다. 얼음을 보관하고 이를 나눠주는 빙고전(氷庫典)을 설치했다고 한다. 고려와 조선도 똑같이 했다. 겨울의 얼음을 여름까지 남기는 일은 국가적 사업이었다. 2000년 전에 어떻게 국가적 차원에서 얼음을 저장할 생각을 다 했을까. 바로 여름철에 쓰기 위해서였다. 무더운 여름에 왕실과 귀족들에게 얼음을 나눠주는 것은 당시 퍽 중요했던 일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는 더욱 체계화됐다. 한강에서 얼음을 잘라다 강변의 빙고에 보관했다. 국가 제사용으로 쓰는 얼음을 관장하는 동빙고(지금의 서울 옥수동), 정승 판서와 나이 든 관료, 고위 관원들에게 나누어 줄 얼음을 관장하는 서빙고(용산 서빙고동)를 따로 뒀다. 대궐 안에는 왕실 전용 얼음을 저장하는 내빙고를 설치했다. 빙고는 아문(관청)이었으며, 이를 관장하는 제조(提調)는 비록 겸직이지만 당상관 아래 2품직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기관이었다. 종5품 별좌가 실무를 봤다. 요즘으로 따지면 국가직 공무원 계장급 서기관에 해당한다.




도쿄빙수 ‘망고 빙수’


민간 빙고를 제외하고 국가가 운영하는 빙고전에서 한 해 벌빙(伐氷)하는 얼음의 양은 약 20만 정(丁)으로 무려 4000t에 이르렀다. 여름이 시작되면 빙표(氷票)를 통해 얼음을 나눠줬는데 이것을 무엇에 썼냐 하면 그게 바로 빙수의 원형이다. 서론이 길었다. 권력자들은 얼음을 잘게 부숴 과일이나 꿀과 함께 시원한 ‘뭔가’를 만들어 먹었다. 오늘날 유행하는 과일빙수의 원리와 다름없다. 화채와도 비슷하다. 아무튼 계절을 거슬렀으니 굉장히 귀한 음식임에 틀림없다. 들어가는 재료 역시 고급스럽기 그지없다. 조선의 빙고가 처음이 아니듯 빙수의 역사는 장빙(얼음을 저장함)의 역사와 함께한다.


빙고를 만들어 저장한 얼음이었는지 겨울에 먹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기원전 중국에선 빙수와 비슷한 음식이 언급된다. 잘게 부순 얼음에 꿀과 과일즙을 섞은 밀사빙(蜜沙氷)이 기록에 나온다. 송대에는 단팥까지 얹은 얼음, 즉 팥빙수도 송사(宋史)에 등장한다.


BC1700년대 수메르인이 만들었다는 빙고, 페르시아의 빙고 야크찰 등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저장된 얼음은 분명히 먹는 용도로도 쓰였다. 얼음을 어떻게 다뤘든 이를 먹었다면 빙수와 비슷한 형태가 된다.



겨울부터 저장한 얼음이 없더라도 권력을 동원해 어렵사리 찾아 먹은 경우도 있다. 카이사르나 네로 등 로마의 거대 권력자들과 마케도니아의 황제 알렉산더 등은 기동력 좋은 마차를 동원해 고산의 만년설을 실어와 기어코 빙수를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그만큼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음식(빙수)을 현대에 사는 우리가 먹고 있는 셈이다.




롯데호텔 ‘멜론 빙수’

근대에 들어 ‘여름의 얼음’이 대중화되면서 세계의 빙수는 자신의 문화 환경에 따라 각각 진화하기 시작한다. 단팥을 조려 얼음에 올려 먹는 한국의 팥빙수, 달달한 각종 시럽을 뿌려 먹는 일본의 가키고오리(かき氷), 형형색색 주스 시럽을 곁들인 미국 하와이의 셰이브드 아이스(shaved ice) 등 각국의 취향에 따라 다른 이름의 식품으로 생겨났다.



현대에 들어선 디저트 개념으로 발전했다. 단순히 얼음에 단팥이나 시럽을 끼얹은 것이 아니라 한국식 팥빙수에는 다양한 재료가 파고들었다. 인절미, 연유, 젤리, 시리얼, 건포도, 미숫가루 등이 척척 올라가 더 이상 음료가 아니라 차가운 후식 역할을 담당했다. 심지어 어떤 집은 산더미처럼 올린 제품을 팔아, 빙수만 먹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다. 어느 순간 빙수는 여름철 ‘달다구리’의 대명사가 됐다.



2000년대 들어서 급속 냉각기의 발달과 다채로운 열대 과일의 유행에 힘입어 한국식 ‘K-빙수’도 퍽 다양해졌다. 우유를 얼려 한결 부드러운 우유빙수(눈꽃빙수)를 개발했으며, 얼음 위에 팥 대신 망고, 멜론, 복숭아, 체리 등 생과일을 올린 과일빙수 등 다양한 종류가 등장했다. 물론 ‘깡통 단팥’이 아니라 제대로 팥을 조려 쓰는 ‘클래식 빙수’의 인기도 여전하다. 이런 빙수는 팥죽과 팥국수 등을 함께 내는 팥 전문점에서 주로 파는데, 빙수의 구성은 대패로 갈아내 서걱거리는 얼음에 정성껏 올린 팥이 전부다.




스위트앤드 ‘짜장면 모양 빙수’


우리 빙수에 비해 일본식 빙수인 가키고오리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게 없다. 보통은 얼음에 시럽만 뿌려서 낸다. 빙수에 곁들이는 시럽은 고오리미츠(こおりみつ)라 부르는데 설탕물, 과일 주스, 탄산음료, 커피시럽, 연유 등이 해당한다. 말차(末茶) 시럽과 단팥으로 적신 녹차 팥빙수도 있다. 아시아의 더운 나라에는 죄다 빙수 비슷한 것을 먹는다. 음식의 뿌리는 애초 같았을 테지만 세월이 흐르며 서양은 아이스크림으로, 동양은 빙수로 각각 발전한 모양새다.


중국에서도 훙더우빙(紅豆氷)이라 부르는 팥빙수가 있으며 대만의 쉐산(雪山)은 국내에서 유행하는 망고 빙수의 원조 격이다. 말레이시아의 아이스 카창(ice kacang)도 일본의 시럽 빙수를 빼닮았다. 필리핀에는 할로 할로(halo halo)란 이름의 시럽 빙수를 곳곳에서 사 먹을 수 있는데 여기엔 설탕물에 조린 콩과 젤리가 들었다. 태국과 베트남에도 각각 전통 빙수인 남깽싸이(맑은 얼음), 얼음 덩어리를 넣은 연유 빙수인 쩨(che)가 있어 무더위를 가시기에 좋다.



혀를 빼물게 만드는 무더위가 언제 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기어코 여름은 지날 것이다. 더위에 지친 몸을 되살릴 냉기와 비타민 가득한 빙수를 곁에 두고 있으니 글자 빽빽한 8월 달력 넘기기가 그다지 두렵지 않다.



놀고먹기연구소장


■ 어디서 맛볼까


◇팥고당

이름처럼 팥 전문점이다. 깔끔하게 단팥만 올린 우유 얼음 빙수를 판다. 이름하여 눈꽃팥빙수다. 팥 고명은 그리 달지 않은 대신 고소한 맛을 품었다. 은은한 단맛은 우유 얼음이 낸다. 놋그릇에 담아내 시원함이 더하다. 빵 피가 얇은 대신 팥소가 가득한 단팥빵도, 겨울에 파는 단팥죽도 맛있다. 연구소를 둔 본점은 서울 강남에 있으나 수도권 백화점이나 몰 곳곳에 입점해 있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고양대로 1955 스타필드 고양. 1만2000원.



◇도쿄빙수

이름은 도쿄빙수인데 푸짐하고 화려한 한국식 빙수를 판다. 각종 과일을 곱게 간 퓌레를 높이 쌓아 올린 얼음 위에 흘러내리도록 끼얹은 빙수다. 겉면의 퓌레를 얼음과 함께 살살 긁어 먹다가 빙수 속에 가득 찬 과육과 퓌레를 발견할 때 즐거움이 배가된다. 시그니처 메뉴인 토마토 빙수를 비롯, 애플망고와 자두, 레몬, 피스타치오, 녹차 등 다양한 재료를 쓴다. 오레오를 사용해 ‘돼지바’ 맛을 낸 메뉴도 인기다. 망원동 본점을 포함해 곳곳에서 즐길 수 있다.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정발산로 24 웨스턴돔1 A동 2층. 빙수 1만3000원.



◇대구 스위트앤드

일명 짜장면 빙수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곳이다. 재치 있는 구성의 ‘옛날 빙수’가 몇 년 전부터 SNS를 뒤흔들었다. 정말 짜장면과 똑같이 만든 빙수다. 면발은 아이스크림으로 만들고 짜장은 단팥으로 연출해 녹색 플라스틱 ‘중국집 그릇’에 담았다. 망고로 재현(?)한 단무지와 흰떡 양파도 따로 내준다. 아, 춘장은 초콜릿 시럽이다. 딸기로 만든 짬뽕 빙수도 있으니 둘이 가면 ‘짬짜’로 즐길 수 있다. 대구 중구 동성로2길 12-36 2층. 1만 원.


◇부산 범일동 매떡

부산, 아니 전국에서 ‘매운맛의 떡볶이’로 소문난 집이다. 경악할 만큼 매운맛을 내는데 그나마 이 맛을 잡아주는 것이 팥빙수다. 가만 보면 팥빙수를 시키지 않은 테이블이 없을 만큼 필수 메뉴다. 특별할 것 없이 버석한 얼음에 달달한 팥과 미숫가루를 얹은 팥빙수는 추억 속 ‘B급’의 맛이지만 매운 혀를 다스려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부산 부산진구 골드테마길 52-2. 떡볶이 5000원, 만두, 김밥, 팥빙수 각 5000원.

◇창동복희집

이 집도 그야말로 ‘팥 플러스 빙수’다. 1970년대 초반 문을 연 이 집의 팥빙수는 정말 예스럽다. 우유를 얼린 것이 아니고 실제 각 얼음을 회전식 대팻날에 갈아서 낸다. 날카로운 얼음 사금파리가 더운 입에 시원한 일격을 날린다. 이 위에 직접 쑨 고소하고 달달한 통팥을 얹어 맛을 더한다. 스푼으로 슬슬 섞어가며 한입씩 맛보면 더위를 잊을 수 있다. 옛날식 떡볶이와도 궁합이 딱이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서북14길 21-1. 6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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