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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주적 사회주의자 Aug 24. 2019

비정치적 집회라는 형용모순을 넘어

조국 사태에 대한 고려대 집회를 바라보며  by 고준우

 정치적인 것은 특정한 정의의 관념에 비추어 (기존 제도의 폐기·중단부터 새로운 제도의 도입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다양한) 변화를 요구하는 행위이다. 특정한 공정성에 대한 주장은 그런 의미에서 누구에게 어떤 몫이 돌아가야 하며 그 원리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묻는 매우 정치적인 주장이다.


 따라서 고려대 집회에서 '우리는 정치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일 뿐이다. 특정한 공적 사안에 대해서 조치나 해결을 요구하는 집회가 '정치적'이지 않다면 또 무엇이 정치적일 수 있단 말인가? 고대 그리스 이래로 광장(forum)에 모인 민중의 토론과 의사표시(발언, 투표 등)는 정치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 중 하나였다. 중앙광장에 모여서 집회를 열고 대학 당국에게 입학비리와 관련된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게 정치적인 것과는 무관하다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가? ‘비정치적 집회’라는 형용모순?


 물론 ‘비정치적’이라는 말로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특정 정당 및 정치세력의 이익에 복무하기 위해 대중들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야 말이 맞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모인 학생들이고, 특정 기성 정치세력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부조리에 저항하고자 뜻을 함께하고 있다고 말이다. 차라리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스스로의 정치적 의도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물론 의도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지워주진 않지만 말이다.) 정치라는 말 자체를 협잡질 정도의 의미를 담아 쓰는 한국의 현실에서 이와 같은 표현의 왜곡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명백히 정치적 행위를 하면서 '비정치성'을 가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 조국에 대해 규탄하는 고려대 집회

 오히려 고려대 집회의 문제는 '정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차별적/배제적인 방식으로' 정치적이라는 점이다. 집회에 모인 학생들의 '순수성'을 증명해보인다며 학생증과 졸업장을 검사한 것은 오히려 문제제기의 정당한 발화자를 '고대생'으로 한정짓는 태도라는 것이다. 조국의 딸이 부정입학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비단 조국의 사례뿐만 아니라 모든 권력형 비리에 대해) 모든 시민들이 함께 관심을 갖고 해결해나가야 할 공적인 사안이 된다.


 그러나 학생증, 졸업장, 응원가로 이어지는 집회의 상징들은 이러한 공적인 사안을 '우리 고대인'의 명예에 흠집을 낸 비리와 쭉정이를 걸러내는 특정 당사자집단의 문제로 재가공한다. 이제 문제는 '시민의 것'이 아니라 '고대생의 것'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고대생의 것'으로 축소된 사안은 사태의 복잡다단한 면들을 일거에 소거시켜 버린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은 어떠한가?


 조국의 딸이 제1저자가 되어 저널에 논문을 등재하는 동안 지식생산의 합리성을 제고해야 할 학계와 대학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왜 대학과 지식생산은 권력의 완전한 포로가 되었는가? 대학은 지금처럼 계층재생산에 복무하는 기능 이외에 보다 다수의 시민들의 평등과 자유에 기여할 수 없는가? (예컨대 비싼 등록금이 만들어내는 계층간 차별은? 사교육과 부모의 경제력에 의존하는 대입제도는 정말 능력주의를 구현하는 제도가 될 수 있는가?) 조국이 이사를 지냈던 웅동학원의 사례를 통해 드러나듯이 한국의 고등-중등교육 기관을 운영하는 사학재단들의 비리 실태는 어떻게 극복되어야 할 것인가? 이런 문제의식을 누구보다 앞장 서서 제기해왔던 조국 본인이 이런 비리를 저질러왔다는 것은 주류화된 진보적 지식인의 도덕적 파산이 아닌가? 이를 극복할 새로운 세대의 정치인/지식인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


 자신의 정체성을 오히려 추상화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대학생'으로, '시민'으로 위치시켜 나가며 보다 다수 대중들과 '연결'되어 (보편적인 시민 다수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고 특권화하는 것이 아니라!) 고민할 수 있는 측면들을 발견해 나가고자 노력할 때 비로소 앞서 열거했던 다양한 정치적 논의거리들이 출현한다. 즉, 보다 '정치적인 상상력'을 동원할 때 사태는 풍부해지고 그 안에서 우리가 함께 논의하고 해결해나가야 될 민주적 논의의 장은 더 큰 정치적 잠재력과 공적인 가치를 띠게 된다는 것이다.


 조국 딸의 부정입학이라는 문제가 '고대인'의 문제일 뿐이라면 절대다수의 시민들이 그들의 특권의식을 고취시켜주기 위해 해당 사안에 함께 분노하고 연대해야 할 이유 따윈 없다. 그러나 이 문제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권력형 비리를 넘어서서 공직자의 윤리를 확립하고 보다 평등한 대학제도와 합리적인 지식생산체계의 성립에 기여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면 이는 비로소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된다. 바로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본디 정치적임을 숨기려드는 정치성이야말로 기만적이고 퇴행적인 법이다. 차라리 우리가 '어떤 정치'를 바라는지를 솔직하게 꺼내놓는 것이 최선이다. 감히 정치적이고자 하라(dare to be poli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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