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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주적 사회주의자 Aug 29. 2019

자, 이제 편을 다시 정하자.

불매운동, 홍콩 시위, 그리고 조국 사태를 가로지르며 by 김창인

 올해 여름, 더위보다 더 큰 문제는 누가 우리 편인지 알 수 없는 혼란이다. 이전에는 같은 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들끼리도 불매운동과 홍콩 시위 그리고 조국 사태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이에 많은 이들이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다. 87년 이래 견고했던 정치적 진영 구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어제의 동맹이 나를 공격하고, 어제의 적은 마치 나와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의 정치 지형이 단순한 상태에서 복잡한 상태로 갑자기 변화한 것이 아니다. 단지 이전까지 숨겨져 있었던 복잡성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한국사회가 재편의 시기로 접어들었음을 시사한다. 즉, 편을 다시 정해야 한다. 누가 ‘적’이며, ‘우리’는 누구인지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     

아베를 반대한다고 모두가 같은 편인 것은 아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보상 판결을 부정하며 무역보복으로 응답한 아베 정부에 대한 전 국민적 분노가 표출된 운동이었다. 정치판은 ‘노노재팬’를 외치며, 불매운동에 불을 질렀다. 조국은 지금이 ‘애국’과 ‘이적’으로 나뉘는 시대라며 스스로 반일투사를 자처했고,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 또한 이러한 흐름에 호응했다. 마치 임진왜란 때로 돌아가 전 국민이 단결하여 일본과 싸워야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불매운동의 한계는 명확하다. 기본적으로 불매운동을 비롯한 소비자 운동은 거대 자본과 소비자 대중 사이의 ‘버티기 싸움’이다. 더욱 많은 자원과 시간을 가진 대기업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싸움이다. ‘소비의 선택권’을 가진 중산층이 주류가 될 수밖에 없는, 계급적 한계 역시 가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불매운동이 향하는 방향이 ‘애국’으로 불리면서, ‘애국’을 할 수 있는 자와 할 수 없는 자가 재산과 계급을 기준으로 나뉘었다. 누구는 ‘배타적 민족주의’에 기반하지 않는 '착한 불매운동'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선 유니클로에서 옷 한 벌 사기가 쉽지 않다. 언제든 ‘매국노’로 매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는 이러한 분위기를 국내 기업들의 규제를 풀어주고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에 이용하고 있다. 국민대담화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은 “당분간 우리 경제가 힘들 것이며, 그것은 일본의 탓이고, 그래서 기업들의 규제를 풀어줄 것이니, 전 국민은 고통을 분담해달라” 요청했다. 그러나 왜 국민들이 기업들의 고통을 분담해야 하는가? 불매운동에 편승하여 애국마케팅에 착수하는 국내 대기업들은 일본기업에 비해 전혀 양심적이지 않다. 일본기업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가 굳이 그들의 배를 불릴 필요가 있는가?

 세상은 ‘애국자’와 ‘토착왜구’로 나뉘지 않는다. 물론 아베와 일본 정부의 행태는 문제적이고, 비판해야 하며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러나 이를 지적하고 비판한다고 해서 모두가 우리 편인 것은 아니다. 낡은 진영논리를 끌어와 ‘토착왜구’에 아베와 자유한국당과 불매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는 이들을 하나로 몰아넣고선, ‘애국자’의 포지션에 위치하고 싶은 당신은 우리 편이 아니다.     

홍콩 시위를 지지하지 않는 당신은 우리 편이 아니다.     


 시선을 한반도 밖으로 돌려보면, 현재 가장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는 곳은 다섯 달째 송환법 반대 투쟁이 이어지고 있는 홍콩이다. 지난 6월16일에는 홍콩 인구의 4분의 1이 넘는 200만 명이 시위에 나서 인구 대비 참여 인원으로 따지면 한국의 촛불 항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 한국에서는 재미있는 반응들이 나오고 있다. 대규모 시민 항쟁을 통해 집권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서는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시위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는 반면, 시민 항쟁으로 권력을 잃은 자유한국당을 위시한 수구세력들이 홍콩 시위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한편 대부분의 진보 정당과 정치조직들은 홍콩 시위대에 적극적인 연대의 뜻을 표하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좌파를 자처하면서도 홍콩의 투쟁을 깎아내리려는 이들 또한 존재한다. 자유한국당과 일부 좌파를 자처하는 이들의 견해가 일치하는 이 기형적인 모습은 그들의 세계관이 과거 냉전 시기의 진영논리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세계관에서 중국은 미국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결집될 수 있는 국제적 진지이며, 홍콩은 서구자유주의에 포섭된 자본주의 첨병이다. 그러나 불매운동 의제와 마찬가지로 ‘미제국주의’와 경쟁한다고 해서 무조건 우리 편인 것은 아니다.

 길고 긴 홍콩 시위의 역사적 배경을 요약하자면, 영국 식민통치기의 억압과 모순들이 반환 이후에도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여기에 더해 중국 공산당의 우경화, 권위주의화가 진행되며 홍콩에서의 민중을 위한 정책들이 전혀 실행되지 않았다. 현재 중국에서는 대학생들의 마르크스주의 독서 모임과 노동운동이 탄압을 받고, 개혁개방의 결과가 누적되며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지는 등 사회주의 이상에 역행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중국 혁명이 이루어낸 성취를 부정할 수는 없으나, 지금의 중국이 좌파가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고 보호해야 할 존재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반대로 홍콩 시위대를 무조건 찬양해야 한다는 이야기 역시 아니다. 실제 홍콩 시위대 내부는 상당히 복잡한 경향들이 얽혀 있고, 그중에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절대화, 영국 식민통치기에 대한 왜곡된 향수, 본토인에 대한 극심한 혐오정서 등 우려되는 경향들 또한 존재한다. 조슈아 웡을 비롯한 시위의 지도자 중 일부가 미국과 긴밀히 접촉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홍콩의 좌파들과 노동운동가들 역시 투쟁에 결합하고 있음을 안다면, 그리고 홍콩 민중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사회경제적 모순이 이번 시위를 더욱 격화시키고 있음을 파악한다면, 홍콩 시위를 서방의 조작이라고 격하하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 시위에 국제적 연대를 표하며, 내부의 다양한 경향을 어떻게 수습하여 진정 민중의 해방을 위한 투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조국 사태로 분명해진 것은, 우리는 그들과 함께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연일 드러나고 있는 조국이라는 인물의 결점은 한 개인의 한계가 아니라, 민주진영을 대표하는 86세대가 가진 한계 그 자체이다. ‘불법 아니니 괜찮다’는 논리는 지금의 법과 제도를 정상화하는 것이 곧 정의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조국의 학벌세습과 수십억 펀드가 합법이라는 것을 통해, 우리는 이 사회에서 얼마나 합법적으로 귀족의 지위가 세습되고 부당한 부가 축적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한 치의 부끄러움이 없는 86세대와 민주진영을 보며, 결국 그들이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것은 더욱 명료해졌다.

법무부 장관 조국이 제시한 정책비전을 보면 놀라울따름이다. 합법의 틀에 저항의 방식을 가두고 있으며, 정실진환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 

 조국을 옹호하는 이들은, 조국에 대한 모든 비판이 자유한국당과 보수언론의 합작품인 ‘가짜뉴스’라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는 노무현에 대한 86세대의 극단적인 트라우마에 기인한 정치대응에 불과하다. ‘문재인 정권’은 ‘노무현 정권’이 아니고, ‘조국’은 ‘노무현’이 아니다. 과거 자신들의 보스를 지키지 못한 그들의 상처는 매우 안타깝지만,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 특정한 방어기제로 구성된 86세대의 세계관은 자유한국당만 사라지면 좋은 세상이 올 거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니 자신들을 공격하는 대상은 모두 수구세력이라는 환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86세대 본인들 또한 자유한국당과 함께 청산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언제까지 자신들이 불의와 맞서는 진보투사인 양 행세할 것인가. 이미 86세대는 기득권 그 자체이며, 대한민국 권력의 중심이 서 있지 않은가.     

편을 다시 정하자  

 ‘진보’와 ‘좌파’를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 그 개념이 아니라, 행동과 입장에 따라 진영을 재구성해야 한다. 진영논리 자체의 한계를 말하기 이전에, 이미 이전에 구성되었던 그 진영 자체가 틀려먹었다. 그러니 ‘적’의 ‘적’은 ‘동지’여야 하는데, 자꾸 ‘적’인 것만 같은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과거의 진영논리에 갇힌다면, 자신들이 진보라 믿는 기득권들(=86세대)의 싸움에 일개 병졸로 동원되는 꼴이다.

 과거 진보세력은 86세대와 민주진영에 큰 빚을 졌다. 군부독재와 그 잔재들에 함께 맞서며 서로 다르지만 공생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고, 싫어도 함께 가야 할 동맹으로 여겼다. 그래서 얻어낸 형식적 민주화와 박근혜 정권의 탄핵은 소중한 역사적 성취다.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진보적 인사들은 민주당으로의 귀결에 ‘타협’하거나, 진보의 역할은 민주진영을 견인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해왔다. 그러나 쏟아지는 정치적 언어들이 예전의 정치적 진영논리 안에 매끄럽게 배열되지 않는 지금, 마침내 결별의 타이밍이 왔다. 안타깝게도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 우리는 당신들을 적으로 호명할 것이고, 당신들이 일궈낸 성과를 발판삼아 당신들이 만들어 온 적폐와 맞서 싸울 것이다. 이 싸움에 함께하는 이들이 바로 새로운 ‘우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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