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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주적 사회주의자 Sep 04. 2019

조국이 쏘아올린 작은 공, 망가진 사회를 비추다.

by 최성용

세월호는 이 사회의 바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말하지면 이 사회가 총체적인 무능과 편법으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걸 백일하에 드러냈다. 애초에 망가진 시스템이었다는 얘기다. 세월호라는 비상사태는 아주 예외적인 극단적 사례가 아니라, 극단적으로 예외적이라고 생각되는 상태가 우리 일상의 삶을 지탱하는 정상상태였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한편에는 공식담론이 있다. 직업윤리나 책임 같이 사람들이 당연히 따를 것이라 기대되는 도덕에 관한 상식이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그 상식들을 휴지조각이 된지 오래라는 사실을 시민들에게 각인시켰다. 선장은 그의 책임을 손쉽게 저버렸고, 진도 VTS도 해경도 청와대도 모두 그들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책임과 역할을 방기했다. 이 사실이 더 충격적인 것은 그런게 무책임하게 굴러가는 시스템이 우리의 일상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있어라”고 권위와 책임을 가진 이의 말을 성실하게 따랐던 사람들은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는 서울 시민에게 “안전하다”고 말하면서 한강대교를 끊고 내뺀 이승만까지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 사회는 공식담론, 도덕과 질서, 국가의 약속 따위를 성실히 따르는 사람이 손해보는 그런 사회다. 약삭빠르게 처신하고 알아서 살아남아야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다. 국가나 권위 따위 조금도 믿을 수 없고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른다. 그래서 직업윤리나 사회적 책임을 지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켜봐야 나만 손해보는 사회다. 그렇게 겉으로만 멀쩡하던 시스템이 결국 세월호 참사를 낳았다. 사회적 권위와 책임을 가진 사람들의 말을 믿고 따랐던 시민들은 죽음으로 내몰렸다


 나는 세월호 참사 당시, 세월호를 진영화된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이는데 강하게 반대했다. 세월호 참사는 복합적인 원인들이 개입된 국가시스템의 문제이지 개별 정권의 성격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월호를 진영화된 이슈로 다룬다는 건 박근혜 정권의 문제로만 생각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는 그 시스템에 동조하고 참여했던 한국사회의 ‘절반’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호가 진영화된 이슈가 되면서, 박근혜 정권을 악마화하고 민주진보진영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빌미로 사용되었다.


조국 후보자가 장관이 되는가의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작금의 ‘조국 사태’가 있다. 실은 조국 후보자가 장관이 되는가의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보단 조국 후보자를 둘러싼 숱한 논란들이, 세월호 이후 바뀐 게 없는 한국 사회의 알몸을 다시 한 번 드러내주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법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하는 후보자마저 이 사회의 적폐스런 관행들에 물들어 있었다. 불법도 아니고 관행일 뿐이었다는 변명은 핵심을 비껴간다. 중요한 것은 직업윤리를 지켜야 할 교육계나 학계가 관행이나 자식 문제라는 핑계를 대며 어떤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질렀는가를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근대의 ‘수도원’이라 불리는 대학에서 전문가로서의 지적, 도덕적 권위를 담당하는 교수들은 전부 망가진 시스템의 공모자일 뿐이었다.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 갈 수 있다는 우리 사회의 공식 담론은 그렇게 다시 한 번 파산났다. 조금 편파적이고 불공정하다 느껴도, 그래도 열심히 하면 된다는 말을 순진하게 믿고 청춘을 바친 이들은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식 담론은 거짓말이었고 현실은 철저히 계급 분할선을 따라 부모를 잘 만나야만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노력했던 이들에게 조국 후보자와 그를 둘러싼 세상은 아주 생경한 풍경이었다. 나아가 애초에 경쟁의 트랙을 견디지 못해 노력이 아니라 포기를 택한 이들에겐 더더욱 다른 세상의 얘기처럼 들렸다.


 이것은 ‘공정성’의 문제가 아니다. 공정성은 이미 폐기된 공식 담론과 도덕을 다시 한 번 부여잡으려는 시도이며 그래서 무용하다. 그보다는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과, 그 현실에서 당연하리라 기대되는 사회의 책임과 도덕이 무너져 있는 간극을 문제시해야 한다. 가령 국가가 학살하고 고문하는 것, 무책임하게 사람들을 버리는 것은 ‘국가폭력’이다. 그리고 ‘열심히 하면 된다’는 공식적 거짓말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아무리 해도 되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탓하게 만들며, 어쩌다가 부모가 성공의 이유라는 것이 알려질 때 사람들을 좌절케 만드는 ‘상징폭력’일 뿐이다. 공정성 담론은 이 문제를 건드리지 못한다. 오히려 ‘부모도 실력’이라는 계급사회의 민낯을 회피하고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누구도 믿을 수 없다. 교수들이 스스로의 특권에 대해 얼마나 몰염치하고 이기적인 집단인지 분명하게 드러났다. 조국이라는 맛있는 사냥감을 먹어치우려는 하이에나 같은 언론에게서 사람들이 본 것은 ‘자극’이니 ‘신뢰’가 아니다. 이 사태에 검찰이 개입한 것은 다시금 사법기관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만을 입증해주었다. 그렇다면 정치는 어떠한가? 조국 사태는 정권만 바뀌었을 뿐 시스템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이들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이익이고 자식의 이익이지, 입에 발린 사회적 책임이나 사회개혁은 후순위에 불과하다. 그렇게 촛불 시민은 적폐청산의 소임을 그 적폐의 또 다른 공모자이자 수혜자에게 맡긴 꼴이 됐다. 세월호 참사와 마찬가지로 시민들은 또 다시 그 누구도 믿지 못한 채 이 적나라한 계급 이익 추구의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한다.


 하지만 이미 망가진 사회가 휘두르는 거대한 폭력에 맞아 아파하는 사람들이 즐비해 있다.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세상일지라도 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눈 돌리지 못하겠다. 언젠가 저들을 휩쓸고 지나간 몽둥이가 나에게도 올지 모른다. 이 사회의 무책임함이 저들의 고통을 만들었다면, 이 사회를 살아가는 동료시민으로서 나에게도 당연히 그 고통에 대한 응분의 책임이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공정한 룰’도 혹은 ‘탈조선’도 아니다. 그 모두 개인화된 해법일 따름이다. 무너진 사회의 신뢰와 연대를 회복하고 그를 위해 사회적 정의를 바로잡는 것, 그래서 이 사회를 믿을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이것은 민주화 운동의 훈장을 개인 출세와 자식 부양의 자산으로 삼았던 86세대와는 정반대편에 놓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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