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최성용
조국 파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현재 국면에선 검찰의 기소와 청문회가 주요한 이슈이지만, 조국 일가가 누린 특권과 그에 대한 계급적 박탈감은 아직 조금도 해소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조국 후보자 일가가 활용한 관계 자본과 문화 자본이 일종의 특권이라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조국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은 일찍이 부르디외가 체계화한 인적 관계나 문화적 수준에서 작동하는 계급적 특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 계급에 속하거나 진영논리에 갇힌 사람들은 그 특권을 ‘관행’이나 ‘누구에게나 묻은 먼지’라고 변명했고, 이 특권에 대한 둔감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계급적 박탈감과 분노를 느끼게 만들었다.
나아가 이 문제를 다루는 사회의 담론 또한 문제적이다. 가령 미디어의 프레이밍, 대학생들의 집회 등에서 주로 등장한 핵심 키워드는 ‘불공정’이다. 소위 공정성 담론에 기대어 지금의 현상을 해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이슈가 과연 공정함의 문제일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공정성 담론을 통해 계급 문제를 해석하는 것은 망가진 사회 시스템을 문제시하지 않고 반창고 몇 개 붙여 적당히 보수하려는 방식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따져보자. 우선 공정성 담론은 그 자체로 불가능한 주장을 하고 있다. 조국 일가가 무슨 대단한 편법적 수단을 동원한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그들이 동원한 특권적 자원은 법의 테두리에선 합법에 해당한다. 이를테면 지인에게 부탁하거나, 명시적 부탁이 없었음에도 어련히 엘리트의 네트워크(나는 이것을 패거리라고 부른다) 안에서 상부상조하는 방식이 행해졌다. 이것을 철저히 금지할 순 없다. 이 경우엔 법적인 방식이 아니라 도덕적인 규제(뒤르케임)가 가능할 따름이다. 나아가 만약 공정성을 철저히 적용해 기회의 평등을 실현하려면 애초에 문화자본의 상속도 금지해야 마땅하다. 이걸 실현할 방법은 갓난아기 때부터 부모와 헤어져 공동육아로 자라나는 방법 밖에 없다. 고대 스파르타에서나 행해진 방식이다. 즉, 애초에 완전하게 공정성을 기하는 건 불가능한 얘기다. (또한 곧이어 논하겠지만 출세를 위한 경쟁을 ‘공정하게’ 하자는 요구는 패거리의 편법과 특권 추구를 전혀 제어하지 못한다.)
이렇게 곰곰이 따져보면 공정성은 애초에 이뤄질 수 없는 것인데, 왜 공정성을 요구하고 있을까? 나는 공정성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위치를 문제 삼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소위 ‘명문대’ 학생들만 집회를 하거나 그들의 목소리만 다루어졌다. 하지만 지방 대학을 다니거나 또는 대학 진학을 하지 않은 ‘청년’들도 공정성에 공감할까? 그보다는 처음부터 공정성 담론은 ‘명문대’ 대학생들만의 담론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었을까. 나아가 이 공정성 요구를 마치 청년세대 전체의 요구인양 보도하는 미디어 역시, 종사자들 다수가 그 정서에 공감할 수 있는 대학 출신들로만 채워져 있는 것 아닌가? 혹은 미디어 종사자라는 엘리트 지위 자체가 그런 공정성 정서에 반응하도록 만드는 위치 아니었을까? 보편이나 일반의 이름을 빌려 출현하는 담론은 대개 특정 집단이나 위치에 선 사람들의 특수한 욕망과 이해를 전체의 것으로 포장하는 방식인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까지는 누구든 할 수 있는 논의일 게다. 나는 공정성 담론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고자 한다. 일단 공정성 요구는 조금의 손해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신자유주의적 인간형과 궁합이 맞다. ‘공정한 경쟁’에 대한 요구는 단순히 불공정한 기회와 과정 탓에 발생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공정하지 않아서 내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감각에 기인한다. 이때 손해를 보는 주체는 철저히 ‘개인’이고, 공정하든 불공정하든 모든 경쟁은 개인들이 참여해 벌이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관계 자본이나 문화 자본과 같은 개념은 구조 혹은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함축하지만, 공정성은 개인의 편법이나 ‘특권’(가령 난민 수용도 특권의 문제로 이해된다)을 지적하는 것에 머무른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 철저하게 공정하려면 요람부터 무덤까지 사람들을 둘러싼 시스템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시스템 자체가 불공정함을 구조적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정성 담론은 이런 문제에는 눈 감는다. 사회나 구조라는 개념 자체가 결여된 채 ‘개인’이라는 개념만 전제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 ‘개인’의 범주는 인서울 명문대를 놓고 싸우는 (특권적 위치에 있으나 이를 개인의 능력으로만 이해하는) 이들에 국한된다.
개인만 존재하고 그 개인의 손해만이 문제시되는 멘탈리티에서 약자의 목소리는 배제되거나 불공정한 것으로 취급된다. 서울대에서 청소노동자가 안타깝게 사망한 것에 대해선 무관심하지만,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도서관 냉난방이 중단되거나 조국 후보자가 그의 관계 자본을 동원해 딸의 출세를 돕는 사례에 대해선 집단적 분노를 표출한다. 약자에 대한 연대에는 무관심한 반면 자신들의 손해에 대해선 아주 예민하다. 이런 정서는 세월호 유가족을 두고 ‘프리라이더’라고 손가락질 했던 일베의 그것과 그리 멀지 않다.
그렇다고 청년 세대를 이기적이라고 문제시하는 손쉬운 결론을 내려선 안 된다. 청년 세대만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역사적으로 그런 인간형을 만들어왔다는 게 진실이다. 억울한 일 당하지 않으려면 출세를 하라는 것은 한국의 근대에 깊숙하게 뿌리박힌 이념이었다. 나는 이것을 ‘출세주의’라고 부른다. 이때 ‘억울한 일’은 단순히 갑질이나 사기를 당하는 경우를 떠올리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억울함’의 트라우마는 해방 직후 국가 건설 과정에서 자행된 학살에 그 뿌리를 둔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건 개소리였고, 국가는 ‘빨갱이 사냥’의 명목 하에 자국민들을 수없이 겁박하고 학살했다.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일부의 특권층을 제외한 대다수 서울 주민은 ‘지켜주겠다’던 이승만이 끊어버린 한강대교를 보며 망연자실해야 했다. 그런 잔인하고 무책임한 국가폭력에 앞장섰던 엘리트들은 일제 시대에 군인이나 경찰이 되어 ‘출세’했던 이들이었고, 다행히 학살의 총구를 피해간 사람들은 그 엘리트들과 지연이나 혈연으로 맺어진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억울한 일을 안 당하지 않기 위해 출세하거나, 출세한 가족을 두거나, 출세한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진리를 한국인에게 뼛속 깊이 새기게 만들었다.
나는 이것이 한국사회의 원형적 체험이라고 본다. 오늘날에도 IMF 구조조정이나 세월호 참사는 사회적 재난에 무책임한 국가-고통을 홀로 견뎌야 하는 개인들의 구조가 여전하기에, 사람들은 계속 동일한 트라우마를 반복적으로 겪고 있다. 그래서 해방 전후부터 지금까지 ‘빽’은 생존에 필수적인 관계 자본이 됐고, 산업화 시기 장남에게 가족의 자원을 몰빵해 명문대 입학시키는 교육열이 생겨났다. 그렇게 출세한 엘리트들은 일제 시대 출세한 선배 엘리트들이 걸었던 길과 마찬가지로, 타인을 짓밟으며 자신의 특권을 축적하는 걸 출세의 방식으로 여겼다. 이들에게 약자의 목소리는 그저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의 자격 없는 항변일 따름이었다. 물론 민주화 운동이나 민주노조운동은 이런 부정의함에 대항해 정의를 바로세우고, 개인의 출세가 아닌 다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는 시도였다. 그들의 운동은 믿을 수 없는 사회를 극복해 신뢰와 연대를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때 정의로웠던 그들도 특권을 획득하고 그것을 고수하려는 운동으로 귀결됐고, 특히 자식에겐 연대가 아닌 각자도생의 출세주의 이념을 물려주었다. 공정성 담론은 바로 이런 역사의 적자다. 지금 외쳐지는 공정성 담론은 신자유주의 하 청년세대가 보여주는 현상이 아니라, 이미 한국 근대의 핵심적 이념인 출세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공정성 담론의 근본적인 모순은 내가 ‘출세주의의 역설’이라고 부르려는 문제를 당면할 때 그 모순이 쉽게 탄로나게 된다. 가족의 투자를 바탕으로 개인이 출세를 달성한다는 것은, 특정한 지대나 카르텔을 공유하는 네트워크, 즉 패거리로 진입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벌, 교수, 언론, 검찰이나 사법부, 교사, 의사, 공무원 등등, 출세의 귀결은 언제나 특정한 집단(패거리)에 속하게 되어 그들의 특수이해(나는 루소의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다)를 공유하게 된다는 걸 뜻한다. 이는 곧 ‘공정한 경쟁’에 대한 요구와 모순을 빚게 된다. 출세를 위해 경쟁할 땐 공정성이 필요하지만, 일단 출세에 달성해 특정 패거리에 진입하게 되면 그 패거리의 특수이익을 패거리가 합심해 추구하게 된다. 비록 그것이 불공정함을 낳는 전형적인 방식일지라도 패거리에 소속되는 것이 출세의 과실인 이상 정당화되어 버린다. 다시 말해 출세주의의 이념으로 출세의 공정함을 요구하던 이는, 이윽고 출세에 달성해 패거리에 진입하게 됨으로써 스스로의 요구를 배반하게 된다. 공정성은 그래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주장에 불과하다.
패거리주의가 작동하면서 생기는 근본적 문제는 사회에 대한 신뢰와 연대가 붕괴된다는 데 있다. 패거리의 특수이익 추구는 ‘자격증’의 수를 제한하는 지대 독점의 방식만 있지 않다. 검찰이 정치에 개입하려는 것, 공무원이나 전문인들이 직업윤리를 담합하여 방기하는 경우도 특수이익 추구의 사례들이다. 사회의 일반이익을 수호해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그 책임에 대응되는 특권을 누리고 있음에도),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패거리의 특수이익이며 그 이익을 누리는 ‘개인’(과 가족)이다. 여기에도 구조나 사회적 연대에 대한 관념이 결여되어 있고, 다만 출세를 위해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취하겠다는 ‘개인’이라는 관념만이 존재한다. 그가 출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수많은 사람의 노동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사회 시스템이 그렇게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무시된다. 이는 무수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없는 각자도생의 세상에서 살아남은 ‘개인’이라는 관념을 전제한다.
이렇게 ‘사회’가 부재함에 따라 특권을 지닌 사람들이 직업윤리나 책임이 내팽개쳤을 때 발생한 가장 비극적 사례를 우리는 이미 겪었다. 바로 세월호 참사다. 선장은 선원을 책임지며 공무원과 국가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언론은 사실에 기반한 균형 잡힌 보도를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상식으로 믿는 ‘공식 담론’(혹은 도덕)이 있다. 하지만 침몰한 세월호가 드러낸 것은 이런 공식 담론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진실’이었다. 공무원이나 전문인들은 자신들의 특권에 대응되는 직업윤리를 지켜 사회의 일반이익에 기여하기보단 패거리의 특수이익을 추구할 뿐이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든 사람들을 버릴 수 있다. 결국 알아서 개인이 살아남아야만 하며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작금의 조국 사태 역시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대학 간다거나 공정한 경쟁을 해야 한다는 공식 담론이 거짓말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이 사회에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부모를 잘 만나거나 어떻게든 시험을 잘 치고 취업을 잘 하는 ‘개인화된 해법’만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는 진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을 뿐이다.
이런 현실은 그래서 공정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의 문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출세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명제 자체를 뒤집어야 한다. 굳이 출세하지 않아도 억울한 일을 겪지 않을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 아닌가? 애초에 공정성은 사회적 연대와 정의가 제대로 전제된 기반 위에서 그 의미를 제대로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붕괴된 사회에서의 공정성이란 생존을 위한 개인들의 아귀다툼과 패거리의 특수이해 추구를 공정한 경쟁으로만 만들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아주 해롭다. 공정성 이전에 아주 당연한 상식과 도덕을 다시 소환해보자. 누구든 억울한 일은 당하면 안 되는 것이고, 최소한의 생존은 모두에게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상식을 무시하는 출세주의나 공정성 담론은 같은 여전히 생존에 대한 책임을 개인이 모조리 짊어지게 만든다는 점에서 올바른 방향이 되지 못한다.
나는 뒤르케임의 개념을 빌려, ‘새로운 도덕’의 출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겠다. 사회적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도덕으로서 기존의 공식 담론은 다 거짓말이었고, 사실상 생존을 위한 적나라한 출세주의와 패거리주의가 이 사회의 진짜 도덕적 이념이었다. 공식 담론과 현실 사이의 이 괴리는 곧 도덕의 부재 상태, 아노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공식 담론을 계속해서 읊어대는 이 사회를 믿지 못하게 되고 홀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믿음이 진실이 된다. 이는 사회적 연대를 파괴하고 해체하는 결과를 낼 뿐이다. 그러므로 한국사회엔 이제 새로운 도덕의 원리, 연대를 강화하는 방식의 도덕이 필요하다. 이 사회가 사람들을 위한 비빌 언덕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나 홀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 수 있는 사회의 구성이 필요하다. 공정성은 이런 전망을 거부한 채 기존의 붕괴된 도덕을 답습하고 반복하는 언어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공정이 아니라 연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