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김창인
1.
2020년 총선을 앞두고 청년정치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등장하고 있다. 각 정당별로 유망한 청년정치인들을 조명하는 한편, 언론들은 조국사태를 마주해 86세대와 구별되는 새로운 세대의 정치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러한 청년정치에 대한 주목은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현상에 불과하다.
언제부터인가 청년정치를 말하는 것은 각 정치세력이 대중들에게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다는 시그널인 동시에, 청년세대에 대한 애정을 표명함으로서 표를 구애하는 행동이 되었다. 기껏 잘 해봐야 기성 정치세력의 입장과 논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청년정치인을 만드는 것이 고작이다. 실제 국회에 입성한 청년 정치인들의 숫자나 그들의 행보를 보면 어렵지 않게 이를 알 수 있다.
86세대에 대한 비판담론으로서 청년정치를 동원하는 것 또한 청년세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기보다는, 문재인 정권을 비판하기 위해 청년세대를 활용하고자하는 의도로 보인다. 청년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86세대의 기만과 위선을 폭로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말로 만 청년정치를 외쳐봐야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청년 정치인이 기성 정치인보다 나은 장점은 무엇이고, 또 청년정치는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내용이 부재하다면, 미숙한 청년 정치인보단 차라리 경험과 연륜을 바탕으로 한 노련한 정치인이 모두를 위해 더 낫지 않은가?
2.
청년정치가 뜻하는 의미는 크게 3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는 청년들이 제도정치에 참여하는 것, 둘째는 청년세대를 대변하는 정치를 하는 것, 셋째는 청년들의 삶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 가지가 전부 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청년들이 제도정치에 참여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면, 굳이 청년들이 정치를 할 필요는 없다. 성소수자-노동자 등 국회가 대표하지 못하는 당사자 혹은 정체성이 한 둘도 아니고, 다른 계급이나 계층에 비해 청년이 우선적으로 대표성을 확보해야할 이유가 마땅히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년세대를 대변하고자 한다면, 그 청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한 규정이 필요한데 이것이 참 어려운 일이다. 일단 나이를 기준으로 한 청년에 대한 정의는 자의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한계가 명확하다. 20대만 청년인지, 19세부터 40세까지 청년인지, 청년을 말하는 사람들마다 다르다. 또한 청년이라는 정체성이 가진 특수성도 무시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청년이 될 것이고, 청년이거나, 청년이었다. 이에 청년의 당사자성은 쉽게 주목받기 편한 만큼, 쉽게 거부되거나 중요하지 않게 치부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렇듯 단일한 정체성으로서 청년의 구성이 쉽지 않은데, 어떻게 그들을 대변할 수 있을까?
청년들의 삶을 위한 정치도 매한가지다. 대학생 청년, 노동자 청년, 지역에 사는 청년, 성소수자 청년, 이주민 청년 등 같은 청년이더라도 삶의 조건이 모두 다른데, 도대체 어떻게 이들 모두의 요구를 수용하는 정치가 가능하단 말인가. 이는 마치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기성 정치인들의 허무한 구호와도 같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 정치를 호명하고, 이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 청년세대의 삶의 조건이 기성세대에 비해 어려운 것은 사실이고, 현실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은 실존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청년인 정치인이 청년세대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면서 청년들의 삶을 개선하겠다고 정치에 뛰어들 수 있다. 하지만 이조차도 명확한 한계가 존재한다. 바로 ‘청년’정치라는 말이 가두는 틀 안에서만 기능한다는 것이다. 이는 청년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이미지에 국한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과 청년의제라고 불리는 몇 가지 사안들에 주력해야 한다는 점으로 나뉘어 이야기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청년은 주로 새로움, 신선함, 톡톡 튀는 아이디어, 에너지와 열정, 겁 없는 도전과 패기 등의 이미지로 소비되어 왔다. 그래서 정치판 안에서도 청년정치인에 기대하는 역할이 이러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형성되곤 한다. 그리고 이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청년답지 못한 것’으로 취급되며 존재의 이유가 사라지도 한다.
청년정치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청년의제로 국한된다는 것도 문제다. 이는 청년정치의 역할이 청년의제의 해결이라는 한계선을 그어놓고, 그 이상의 논의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소위 지옥고(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에 사는 청년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한다고 했을 때, 이는 한국사회의 부동산 문제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런데 이를 청년세대만의 고유한 문제로 설정한다면, 본질적인 해결이 불가능해지거나 방향이 잘못되기 십상이다. 덤으로 청년의제는 청년정치인의 몫이라며 기성 정치판에서는 도외시하는 왜곡된 문화가 생길 수도 있다.
4.
역설적이게도 청년정치의 답은 ‘청년’이 아니라, ‘정치’에 있다. 현재 한국사회에는 탈정치의 혹은 반정치의 흐름이 거세게 불고 있다. 탈정치가 정치혐오를 주요 수단으로 대중들을 정치에서 이탈하게 한다면, 반정치는 정치가 가능한 조건을 부수는 행동양식들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탈정치와 반정치는 청년세대가 주요한 공간인 대학과 SNS를 중심으로 더욱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맞서 정치가 가능한 조건을 복원하고, 정치를 통해 삶을 규정하고 논하는 청년세대를 구축해야 한다. 청년을 통해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를 통해 청년세대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는 세대적 집단의 경험을 정치화하는 것으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집단이건 그 집단을 구성하는 가장 큰 소재는 바로 집단적 경험이다. 세대 또한 그렇다. 86세대가 6월 항쟁과 노무현의 죽음이라는 집단적 경험을 공유하며 세대의 정치성을 확보하고 구축해온 것처럼, 새로운 세대의 구성은 그들의 집단적 경험에 기초할 수 있을 것이다. IMF부터 세월호까지 신자유주의 시대에 성장한 지금의 청년세대의 특질과 함께, 그들이 공통적으로 겪어온 삶의 경험을 집단적 경험으로 공유할 수 있다면,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새로운 세대의 구성도 불가능하지 않다. ‘청년’정치가 아니라 청년‘정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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