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고준우
“왜 민주적 사회주의인가?” 이 하나의 문장으로 우리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의문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왜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느냐는 의문입니다. 단순하게 ‘사회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란 용어를 사용하면 안 되는가? 즉, 민주적 사회주의는 기존의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라는 용어와는 다른 무엇을 지칭하는 용어인가? 그렇다면 민주적 사회주의는 사회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이 함축되어 있는 셈입니다. 이들 질문은 한편으로 민주적 사회주의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왜 지금 ‘민주적 사회주의’를 말하느냐는 의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회주의 국가들 대다수가 붕괴되고 남아있는 사회주의 국가들조차 체제전환을 꾀하고 있는 이때, 사회주의를 다시금 주장하는 것의 의미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필요성과 가능성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는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사회주의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 글은 이와 같은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 쓰였습니다.
그러나 이글은 어디까지나 ‘간략한 답변’일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위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의 역사와 그에 대한 이론적 평가를 수반하는 (따라서 다양한 쟁점들을 포괄하는) 복잡한 작업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 글은 한정된 지면 안에서 최대한 요약된 답변만을 제시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민주적 사회주의는 그 형태를 이미 완전하게 갖추고 있어 고정불변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이념 아래에서 이뤄지는 실천과 토론에 의해 늘 새롭게 구성되고 변화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민주적 사회주의를 완전하고 엄밀하게 규정하고 정의내리는 글이라기보다 민주적 사회주의를 구성하기 위한 담론 형성에 개입하고 실천을 촉발하기 위한 글인 셈입니다.
먼저 민주적 사회주의란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민주적 사회주의’란 역사적 사회주의의 한계들을 극복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보다 강조하는 사회주의의 새로운 판본을 말합니다. 사회주의란 인간이 향유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물질적인 조건이 개별 인간의 힘만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창출되는 것임에 주목합니다. 개인과 개인의 협력, 나아가 그 협력을 구조화하고 유지시켜주는 각종 다양한 제도(예컨대 법)와 사회구조(예컨대 언어)의 뒷받침이 없었더라면 개인이 누릴 수 있는 물질적 부(富)와 권리도 형성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운영되는 생산수단 역시 사회적으로 통제해야 한다고, 특정한 개인이 사회적으로 산출된 부를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운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모두가 함께 이뤄낸 물질적 조건을 소수가 통제한다는 점에서 정의롭지 못하며, 나아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다수의 시민들을 가진 자들에게 예속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비용절감을 이유로 들어 해고, 위험의 외주화 등 한 사람의 생존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자(부르주아 계급)와 그에게 예속되어 일하지 않으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조차 누릴 수 없는 자(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격차, 언제든 더 많은 이윤을 위해서라면 후속 세대와 다수 시민들의 삶은 신경 쓰지 않고 환경을 파괴할 수 있는 자(소수의 지주와 자본가)와 그로부터 피해를 입는 자(다수의 일반 시민)의 격차야 말로 사회주의가 극복해야 한다고 여기는 이 사회의 ‘핵심적인 모순’인 것입니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독점하는 특권적 소수에 맞서 자신의 노동에 의존하여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보편적 다수의 정치를 옹호하게 됩니다. 이는 사회적으로 산출된 부에 대해 개인마다의 기여를 합리적으로 측정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정당한 몫을 분배할 수 있다는 개인주의 이데올로기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바탕으로 이윤추구를 위해 모든 사회적 자원을 동원하고 때론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맞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회주의는 한편으로는 반자본주의와,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와 맥락을 같이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의 새로운 판본으로서 ‘민주적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의 맥락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투쟁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한계들을 극복하기 위함입니다. 마르크스 이래로 사회주의 운동의 방향은 자본주의 사회의 ‘외부’에 사회주의적 이상향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구축한 고도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산양식의 구축을 달성하는 것으로 모아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혁명’과 ‘이행’이라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는 ‘혁명’을 통해 일시적으로 생산수단을 자본가들로부터 빼앗고 피지배계급인 프롤레타리아의 통제 아래에 둘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이상적으로 바라는 사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생산력을 유지하면서 (즉, 다시금 사회질서를 회복하면서) 기존의 각종 사회제도들을 차츰 변화시키고 이에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 나가는 기간이 필요하게 됩니다. 바로 ‘이행’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 이행의 과정에서 혁명기의 불안정을 수습하기 위해 도입된 예외적 통치체제가 장기화되고 고착화되면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과 지배-예속관계(예컨대 노멘클라투라)를 도입하면서 사회주의의 본래 목적이었던 계급해방과는 멀어지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역사를 되짚어 보면, 사회주의 혁명들에서 혁명가 조직인 당을 중심으로 새로운 비민주적 지배세력이 탄생하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혁명세력과의 투쟁 속에서 혁명세력이 보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엘리트조직으로 변모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결국 혁명의 집행부는 초기에는 대중들의 해방을 기치로 내걸지만, 그 대중들이 자신들에게 맞서 해방을 보다 급진적으로 요구할 때 그 요구를 ‘반혁명’의 죄목으로 좌절시키고 사회질서 속에 강제로 복속시키려는 진압의 충동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러한 대중과 혁명 엘리트 사이의 긴장이 혁명과 이행에서의 반민주주의와 새로운 지배-예속의 도입이라는 문제로의 길을 열어두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회주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마련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사회주의의 이상(理想)을 달성하는 데에도 실패해왔습니다. 끝내는 민주주의를 제약하고 희생시킴으로써 혁명 엘리트들(과 관료들)의 새로운 계급적 우위를 보장해왔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실패를 넘어서서 사회주의를 사고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의 요청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 사회주의가 낯설기만 한 대중들과 대중들에게 스스로의 해방을 위해 일어설 것을 요청해야 하는 혁명가들의 관계에서부터 거꾸로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스스로의 해방을 주장하는 대중들과 새로 형성된 ‘사회주의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혁명 엘리트들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대중정치)의 아포리아는 혁명과 이행에 있어 우회할 수 없는 핵심적인 질문이 됩니다. 이런 까닭에 오늘날 다시금 사회주의를 주장하고자 하는 세계 곳곳의 정치세력들이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통해 사회주의의 새로운 판본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입장은 흔히 ‘사회민주주의’로 표상되는 정치적 입장들과도 구분됩니다. 민주적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며, 역사적 사회주의의 성취와 한계들을 전체주의라는 딱지를 붙여 뭉뚱그리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의회주의적 정치만이 바람직한 정치의 형태라고 주장하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민주적 사회주의는 의회와 법을 비롯한 각종 사회제도의 안팎을 가로지르는 가운데, 기존의 역사적 경로들을 참조하면서 사회주의의 이상을 달성할 보다 민주적인 경로는 없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우리에게는 민주적 사회주의가 필요한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제기할 수 있겠지만, 대체로 이견이 없을 두 가지 핵심적 측면에서 답변을 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존의 측면입니다. 자본주의는 오늘날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가장 가깝게는 위험의 외주화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위험의 외주화란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일거리들을 본사가 직접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파견직 비정규직에게 떠넘기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한 사람의 생명이 자본가에게는 유가족에 대한 위자료, 기업에 대한 사회적 평판, 안전장비 설치 및 안전교육에 들어가는 비용들을 저울에 올려놓고 견주는 ‘비용’의 문제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의 생명이 비용으로 집계되는 것을 당연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위험의 외주화로 인한 비극들(구의역 사건, 김용균 사건)이 되풀이되기가 너무나도 쉬운 것입니다.
위험의 외주화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초래하고 있는 광범위한 환경파괴로 인해 생존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더 많은 부를 위해 자연을 희생시키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환경에 유해한 물질을 만들어 방출하거나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에 있어 핵심적인 녹지를 개발하는 것 등이 그 예시입니다. 이러한 환경파괴는 오늘날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를 야기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공해로 인한 질병 발생, 미세먼지와 사막화, 기후이상으로 인한 자연재해 등 인간이 입는 피해 역시 커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관심사는 더 많은 부를 거둬드리는 것뿐이며 따라서 환경오염 역시 국가가 부과한 과세 등 ‘비용’의 문제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자본은 비용을 감수하고서라도 더 많은 부를 독점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면 기꺼이 환경을 파괴하는 데 앞장설 수 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생명과 환경의 문제를 비용의 문제로 치환하여 극복해버리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가 오늘날 절대다수의 사람들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이유이자 동시에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물질적 삶에 대한 다수의 통제가 이뤄져야 된다고 믿는 민주적 사회주의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생존의 측면 이외에 우리가 또한 민주적 사회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할 수 있는 다른 측면은 존엄의 측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이 존엄하다고 믿습니다. 즉, 인간에게는 감히 침해해서는 안 되는 고유한 삶의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감히 침해해서는 안 될 고유한 삶의 조건’이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고대부터 출발하여 시민혁명과 민주주의 혁명을 거치며 오늘날 상식으로 자리 잡은 믿음에 따르면 인간이 공동체 내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을 때 인간 존엄은 달성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이와 같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위축시킵니다. 자본주의는 겉으로는 더 많은 부를 통해 자유를 증진시켜주는 것처럼 비치지만, 그 부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자유는 특권층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맙니다. 고소득층의 소득만 증대되고 저소득층의 소득은 정체되는 상황, 고소득층은 각종 인맥과 자원을 이용해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지위를 물려주지만 저소득층은 자녀 세대는 고사하고 자신의 노후조차 돌 볼 수 없는 상황에 이와 같은 계급적 불평등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는 특권적 소수만이 아니라 다수로부터 배제된 ‘소수자들’을 만들어내는 데에도 일조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강하고 순종적인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노동력 재생산은 개별 가정의 단위에서 이뤄지는 돌봄노동에서부터 시작해 전체 국가 차원에서 인구의 재생산과 적절한 훈육을 위한 정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조절과 개입을 요청하는 일입니다. 이 과정에서 ‘건강하고 순종적인 노동력’을 (재)생산해내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이들은 사회적으로 ‘쓸모가 없는’ 존재로 낙인찍히고 배제됩니다. 이성애 중심의 가족 질서에서 벗어난 성소수자들, 가부장적 질서 내에서 출산과 돌봄노동을 담당할 것을 요구받고 이에 저항하면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는 여성들, 자본이 원하는 값싸고 효율적인 노동력의 범주에서 벗어난 장애인들, 보다 나은 경제적 위치를 점하기 위한 경쟁에서 배제된 빈민들 등이 이러한 소수자에 해당합니다. 물론 소수자 정체성들 각각은 자본주의만으로 환원할 수 없는 독자적이고 고유한 차별의 기제(mechanism)와 대항하고 있지만 그와 같은 기제들은 자본주의와 만나 더욱 강고한 물질성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낳고 강화하는 계급적 불평등과 소수자 차별은 필연적으로 자유와 평등 모두를 해치게 됩니다. 자유가 억압되는 과정은 불평등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특권적 소수의 압제를 전제하며, 반대로 평등이 부정되는 과정 역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자유의 박탈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자유는 증진시키지만 평등은 위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 모두를 위축시키며 따라서 존엄한 인간 삶의 조건을 붕괴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을 위한 투쟁은 반자본주의 운동과 궤를 같이하며, 반자본주의 운동의 가장 유력한 정치적 이념으로서 민주적 사회주의 또한 인간의 존엄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그 필요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민주적 사회주의가 이처럼 우리의 생존과 존엄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민주적 사회주의는 가능할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몇 줄의 글만으로는 명쾌하게 이뤄질 수 없습니다. 어떠한 탁월한 이론도 인간의 미래를 완전하게 예측하여 보여줄 수 없으며 정확한 확률조차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이론적 정교함을 갖추지도 못한 한 편의 짧은 글에서 사회적 변혁의 전망을 온전히 논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계시록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저 제가 최대한의 성실함과 솔직함을 담아 말할 수 있는 것은, 민주적 사회주의는 인간의 의식적 노력 없이 사회구조의 운동과정 속에서 저절로 도래하는 이상향이 아니라는 것, 따라서 민주적 사회주의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이들이라면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고자 하는 이론적 실천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 속에서 그 가능성을 끊임없이 실험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민주적 사회주의의 가치들을 신뢰하고 이를 사회 속에서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이 사회적으로 더 늘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가능성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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