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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준 Dec 10. 2021

[1]왜 당신들만 옳고 우리는 틀린가?

-다케다 세이지

 다원주의와 상대주의가 득세한다. 하지만 철학의 존재 이유는 보편원리 탐구이다.


실존주의를 필두로 등장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위세는 꺾일 줄을 모른다. 마르쿠스 가브리엘 등의 신실재론자들의 대응이 효과적이지 못했나보다.  가브리엘의 위상은 날로 커져가지만, 그리고 그의 사상은 분명히 참신하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의 진리관을 위협하는 데는 (현재까지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데리다의 "텍스트의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을 논파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말이다.

마르쿠스 가브리엘

 참고 : 기존의 실재론은 반 실재론(anti-realism)에 대항하지만, 신실재론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에 대항한다.



 하지만 철학의 가치는 본질 영역의 보편원리 탐구에 있다.


 종교는 스토리로, 공동체는 전통을 수단으로 삼아 진리를 추구하기에 일반성을 넘어설 수 없지만, 철학은 개념과 이성을 수단으로 삼으므로 보편성에 다가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는 성스러운 것이 진리이지만, 철학은 진리만을 성스럽게 여긴다.

 물론 궁극적이고 영원한 절대적 진리는 소유할 수 없지만, 우리 사회가 붙들어야 할 보편원리는 철학만이 제시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자가 추구하는 실재론은 반 실재론에 대한 대응이라기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대응이다(따라서 플라톤 전통의 일자(The One)적인 진리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므로, 독단론으로 오용될 가능성이 적다).


 하지만 보편원리를 추구하던 근대(반 실재론에 대응하는 가운데 실재의 위상을 과도하게 설정한 시기)가 전체주의, 유럽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며 양차 대전이라는 충격적인 이벤트를 일으켰고, 그 상처로 상대주의 회의론이 패러다임이 되었다. 나아가 현재는 보편원리의 구축 시도 자체를 거부하려는 회의론이 하나의 보편원리로 기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그 자체로 논리적 오류이므로, 회의주의의 달콤한 꿈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진리가 없다는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명제만큼은 True여야 하기 때문이다. 분명 주디스 버틀러 젠더관이나 로티의 아이러니스트 사상은 강력하고 매력적인 상대론이다. 이 부분은 추후 논의하겠다.



 어쨌든, 보편원리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인식 문제 해결이다.

 그 이유는 존재의 물음과 언어의 물음은 인식의 물음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인식의 문제에 논리적 현상적(현실, 실증적) 해결책이 보이는 지점은 근대의 칸트에서야 비로소 발견된다.

 

 데카르트는 소 회의론자를 격파하며 인식 존재를 증명하지만, 객관과 주관 /정신과 신체 /이성과 감정의 연결에는 실패한다.

 스피노자는 파르메니데스적 존재를 무한신으로 설정, 인식 문제 해결을 시도하나 현실성이 없다.

 칸트는 오성의 범주로 인식의 객관성과 도덕 법칙의 공정성을 확립하지만,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실천동력의 근거가 되는 물자체(목적의 세계)는 미지로 남긴다. 이는 회의론도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는, 지나치게 포괄적인(내적 모순을 지닌) 공정성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칸트의 이론이 공정하게 우수한 이론인지에 대해 논하기 어렵다. 즉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현실적 구체성이 없다.

 헤겔의 공헌은 지대하다. 칸트의 공정성을 자유의 상호승인으로 대체, 논의의 세계를 현실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변증법적 운동과 진보하는 절대정신을 통해 인식의 보편적 근거를 마련한다. 이 획기적인 전략으로 '보편원리'는 그 내용의 구체성을 역사적으로 획득하며, '보편원리'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완성된다는 발전 사관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헤겔에게는 방어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으니, 이는 그 근본 전제가 중세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 즉 역사의 필연성과 발전관의 근거인 절대정신(신)을 상정했다는 것이다. 결국 고대와 중세와 근대를 종합하려 했던 시도는 신의 완성이자 신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니체는 보편원리 문제 해결의 두 열쇠 중 하나이므로 잠시 제쳐두자.)


악셀 호네트
 신 없이, 심리학적으로 보편원리 문제를 해결하려는 악셀 호네트를 살펴보자.

 호네트의 시도에 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헤겔의 유산에서 신을 빼면 호네트가 나올지도 모른다. 어쨌든 호네트는 보편원리를 제시하는 게 철학의 역할임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호네트의 인정 개념의 주요한 근거인 미드의 정서발달이론이(자신감-자존감-자부심) 현실적인 관념과 일치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신이 없으면 학문도 힘들다. 즉 호네트가 제시하는 보편원리인 '근대성'이 (민주사회주의, 자유의 확장, 공화국의 원리, 전통적 가족 관계 형성, 노조의 확장) 등이 왜 앞으로도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인지를 논증하기 어렵다.



  정리하면 보편원리 확립에서 호네트의 한계는 두 가지이다.


 첫째, 근대성 고찰과 그 담론은 인간 정서를 (신이 개입하지 않는) 역사 흐름의 추동력으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한 적절한 논거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호네트가 이 부분을 논증하려면 사회심리학과 연합하여 다윈과 같은 전 인류적 증거를 추가적으로 제시해야 한다(쉽게 말하면 '정의의 권리'에 나온 근대성 분석은 유럽인에게만 유효하다).


 둘째, (이 부분이 핵심 난제인데) 정서적 사실과 도덕적 당위를 연결한 것에 대한 추가적인 해명이 필요하다. 즉 자연주의적 오류의 수수께끼를 해결해야 한다.




 보편원리를 확립하려는 호네트의 ‘인정투쟁’ 론은 매력적이다. 하지만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이론 역시 (현재까지는) 적절한 대안이 되기 어렵다. 첫째는 보편인식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협소한 당시 지배적인 서구(유럽, 미국)의 근대성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첫째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미드의 정서 발달론이 인간사회의 보편 도덕 원리로, 하나의 당위적인 사회체제를 제시하는 근거로 자리매김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물음, 즉 “자연주의적 오류를 해결할 수 있느냐?(혹은 심리학이 보편원리의 자격을 갖출 수 있느냐)”에 대한 성공적인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보편원리에 대한 해법은 여전히 요원할 수밖에 없다.



                                                                 -1강 끝-


    (니체를 기다리는 분은 다음 강을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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