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우리 운명을 결정한다. 라고 프로이트는 말했다.
“우연이 우리 운명을 결정할 자격이 있다고 간주하라.”고 프로이트는 말했다.
이 진술의 함의는 비단 프로이트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프로이트, 니체, 블루멘베르크, 데이비슨 모두 우리가 숭배하는 모든 실재(전통 진리관)적인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말한다. 리처드 로티는 이런 입장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옛날 옛적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를 넘어, 있는 어떤 것을 숭배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었다. 17세기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신에 대한 사랑을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대체하고자 했으며, 과학에 의해 묘사된 세계를 준準신적인 것 quasi-divinity로 취급했다. 18세기 말엽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과학적 진리에 대한 사랑을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대체하고자 했으며, 우리 자신의 심오한 정신적이며 시적인 본성을 숭배하고 그것을 또 하나의 준準신적인 것으로 취급했다.” - <리처드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中>
<존재의 우연성, 선악의 상대성(관점성), 의미의 우발성>은 로티의 핵심이다. 즉, 로티의 세계는 모든 것을 시간과 우연의 산물로 여기는 그러한 지점 어딘가에 있다. 그곳은 실재적으로 규정되지도 않고, 대립 어휘를 통해 반추할 수도 없다. 대립항이 생긴다는 것은 기준항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대립 어휘가 확고하게 존재한다는 말은, 이미 그 어휘가 하나의 규준, 즉 표상으로 읽힌다는 의미이다. 표상은 세계에 대한 신격화(실재화)이며 ‘하이데거적인 향수병’에 불과한 것. 그러니 로티가 추구하는 어휘는 언표할 수 없는 무언가다.
멋들어지게 써놨지만 결국 로티의 핵심은 고르기아스의 “안다 해도 전달할 수 없다.”는 말과 별반 차이가 없지 않은가
물론 이러한 비판에도 로티는 꿈쩍하지 않는다. 로티는 이 문제를 극복하면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를 주장하는 게 아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려는 순간 또 하나의 규준이 개입된다는 난제(Aporia)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를 비판하는 주장을 논박하지도 않는다. 다만 트롤리 딜레마 같은 질문이 신학자에게나 어울리는 고리타분한 물음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며 자신의 이론을 메타포로 드러낸다.
<트롤리 딜레마의 예 : m*n 수의 무고한 다른 생명을 구하기 위해 n명의 무고한 사람들에게 고민이 가해지는 건 옳은 일인가? 그렇다면, n과 m의 적정한 수치는 얼마인가?“>
로티가 결국 회의론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리고 회의론의 끝에서 회의론을 주장하는 위대한 철학자임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철학의 존재 이유는 보편원리 확립에 있다. 결국 본자가 극복해야 할 최종 목표는 리처드 로티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티는 정말 매력적이다. 특히 로티가 자유주의자라면 메타포를 추구하라는 말에 찬사를 보낸다. 어휘의 여백을 통해 개인이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있을 뿐, 어떤 사물, 감정에 대응되는 언어 따위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까지 싸워보리라(고르기아스는 정말 큰 질문을 던졌다).
p.s. 하이데거는 신만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다, 라고 말했지만, 로티는 아마 이렇게 말하리라.
“시(문학)만이 개인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리고 니체는 이런 말을 남겼다.
“진리란 메타포들이 기동하는 군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