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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부를 끄집어내는 두 가지 방식
그래서 <랑종>을 단순히 잔인하고 그로테스크한 영화만으로 낙인찍어서는 안 된다. 이 영화는 인류사를 관통하는 ‘터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하는 가운데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 다루는 방식이 자못 참신하다. 스크린 내에서는 ‘귀신’을 통해 터부를 추상하고, 스크린 밖에서는 ‘논란’을 통해서 터부를 드러낸다. 먼저 스크린 밖에서 ‘욕받이가 되는 방식’을 살펴보자.
<랑종>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다. 종교, 주술, 미신, 영매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하기에는 좀비 귀신에 대한 희화화가 차고 넘친다. <콘스탄틴(2005)>에서 키아누 리부스가 루시퍼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는 장면은 꽤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이로써 할리우드에서도 신성모독이 더는 터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루시퍼를 건드린 건 괜찮지만 메시아를 건드리는 건 안 된다는 법칙도 진즉에 깨졌다. <브루스 올마이티(2003)>가 대략 이십 년 전에 등장한 것을 보면 <랑종>이 “신을 모독했기에 논란의 중심에 섰다.”라는 말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이 역시 본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랑종>의 관람객들이 각종 평과 댓글을 통해 문제 삼는 부분도 신과 영매를 건드렸다는 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한물간 터부. 따라서 더는 터부가 아니다.
태국에서 최초로 1억 바트 수익을 돌파했음에도 유독 한국 관객들의 평점이 박한 이유는 현재 한국사회의 터부 3가지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여성이 자신의 음부에 손을 대는 장면, 신에게 빙의된 인간(?)이 갓 돌 지난 아이의 내장을 뜯어 먹는 장면, 팔뚝보다 작은 애완견을 펄펄 끓는 냄비에 산채로 넣는 장면 등이 그것이다. 이는 작금의 한국 사회가 가만 놔둘 리 없는 3대 소재인 여성, 반려동물, 아동이다.
‘윤지오 사건,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민식이 법’ 등을 풍자하거나 정치적으로 판가름하려는 게 아니다. 남녀평등은 조건 없이 달성해야 할 과제이고, 동물의 권리를 진지하게 논의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수많은 아동을 ‘위해환경’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버마스가 말한 개방적인 공론장이 기능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여성, 동물, 아동의 터부화가 지나치게 견고하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즉 나홍진 감독이 누구나 피하는 3가지 소재를 굳이 영화의 장면으로 설정한 이유는, 터부를 건드리지 말라는 전제적 구조에 대한 저항을 몸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터부에 대한 저항
어쩌면 제작진은 ‘여성의 성적 묘사와 관음증, 랑종’이라는 표어를 선봉으로 내세운 여론의 공격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이는 감독의 메시지를 메타적으로 드러내는 사회적 장치이자, 영화적 전략일 수 있다. 지나치게 금기시되고, 일방적인 선악 담론으로 환원된 논의의 장을 재규정하여 3대 터부의 거추장스러운 신비를 벗겨 시민사회의 공론장에서 합리적인 대화를 통해 더 나은 젠더, 탈 인간중심주의, 건전한 교육 등을 논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이 또한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이야말로 우리가 공포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언론사에서 위의 영역에 대한 건전한 담론을 진지하게 시도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없다. 검증되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아 시종일관 허수아비만 때려대는 유튜브 영상이 난무하고, 이에 경도되는 청소년들이 많아도 기성 언론은 이를 바로잡을 용기를 내지 않았다. 물론 필자 또한 금기의 영역을 들추어 뭇매 맞기를 원하지 않는다. 필자는 그렇게 용감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랑종>의 메시지가 “터부는 원시적인 인간의 본능인 동시에,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 두렵지만, 용기를 갖고 마주해야 하는 것”임을 안다.
더하여 한나 아렌트가 ‘순전한 무사유의 죄’를 지적한 것도 안다. 알랭 바디유가 어떤 정체성(터부)을 기반으로 하는 가장된 민주주의는 수구를 공고히 하는 수단이라고 역설했다는 것도 안다. 공론장에서의 치열한 투쟁 없이 이루어진 선거는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에 불과하고 옳은 것일지라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확정하는 것은 전체주의 사회의 첫 단추라는 것도 안다. 따라서 우리는 용기를 내어 터부를 메타적으로 바라보고, 주체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그게 영화 <랑종>의 숨겨진, 그리고 본질적인 메시지이다.
터부는 금기. 우리는 금지된 것을 욕망하고, 금지된 것은 언젠가 분출하기 마련이다. 물론 여성은 해방되어야 하고 동물은 삶의 주체로 대우받을 필요가(적어도 논의할 이유가) 충분하며 아이의 생명은 불가침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가치들이 실효성을 얻기 위해서는 상호주관적인 공감대가 필요한 법.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는 설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고, 차이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그때 비로소 목적의 왕국이 아닌 생활세계 내에서 여성과 동물과 아이가 전제적 군주로서의 악명을 떨쳐내고 공가능적(compossible)인 진리로 빛날 수 있는 것이다. 진보가 해낸 많은 업적에도 불구, 진보의 ‘위기’를 운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가 바로 터부에 대한 무기력한 순응과 회피 때문이 아닐까. 진보의 정신은 누가 뭐래도 ‘순응하지 말자’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