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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준 Dec 15. 2021

[영화추천-랑종]①나홍진, 곡성의 마침표<랑종>

1/3

터부는 물을 수 없기에 신성하며(Sacar) 무지의 영역이므로 부정하고 위험하다(Unrein).

랑종은 곡성의 테마를 공유한다. 그리고 더 치밀하다.


<블레어 위치(1999)>보다 무섭고, <파라노말 액티비티(2007)>보다 치밀하고, <곡성(2016)>만큼 복잡하다. 페이크 다큐만이 해낼 수 있는 관조적이고도 리얼한 묘사를 통해 차안(此岸)의 세계만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만드는 영화. AI가 운전을 대신하고, 인공장기가 포스트 휴먼을 만들어 내는 이 시대에도 언리얼한 주술의 세계야말로 우리 삶의 본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랑종>. 두 번 보기 힘들지만, 두 번 봐야 재미있다.

 <랑종>은 <곡성>의 테마를 공유한다. 선과 악, 믿음과 의심의 변주로 관객을 혼란시키고, 수많은 해석을 열어 둔다. 대사와 장면 하나 허투루 쓰는 법이 없어 ‘자기 신발 잘 찾아’라는 대사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아주 강렬한 영상미와 배우의 열연이 가미되니 화제를 일으킬 수밖에. 그들의 캐스팅에 찬사를 보낸다.



 

 일부 평자는 ‘나홍진’ 표의 일관성이 드러난 점은 인정할 만하나, <랑종>은 단지 <곡성>의 오마주에 불과한 참신성 없는 졸작이라며 이 영화를 평가절하한다. 하지만 이들은 <곡성>에서 은밀하게 드러낸 ‘터부’를 간과했다. <곡성>은 딸 ‘효진’이 부모의 성관계를 목격하는 장면을 통해 기존의 터부가 노출되고, 노출된 터부는 그 신비와 권능을 상실하여 새로운 터부가 등장할 것을 예고한다. 터부의 노출은 터부의 의심과 동의어로 기능한다. ‘종구’가 기존의 믿음을 의심하는 순간, 모든 것이 파괴된다는 ‘곡성’의 메시지를 읽어냈다면 <랑종> 또한 터부의 변증법을 다룬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나홍진과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이 <곡성>을 완성하는 단계로 <랑종>을 만들었다고 느끼는 건 비단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황해(2010)>부터 줄곧 인간, 세계의 이중성과 모호성을 드러내는데 전력을 다한 나홍진. 그리고 양면적인 감정적 태도를 기초로 성장하는 터부. 그렇다면 선악(善惡), 진위(眞僞), 주객(主客)이 혼재하는 ‘나홍진’ 표 작품의 근원은 ‘터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랑종>은 대놓고 ‘터부’를 관찰한다.



귀신은 터부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라는 논문에서 체념된 터부를 신의 이름으로 자행하기 위한 도구가 주술과 미신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발산하고픈 근원적인 욕망은 터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터부를 파괴하는 동시에 새로운 터부를 생산하는 게 우리 인간의 본연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터부는 신과 종교보다 선행하고 터부의 근원은 가장 원시적인 동시에 가장 지속력이 강한 인류의 본능이니까.

 숭배와 기피 이전의 ‘악마적 권능’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사에 꼭꼭 숨겨져 있지만, 판도라의 상자는 언젠가 열리는 법. 문명과 사회로 억제된 인간의 본성은, 터부가 됨으로써 점점 더 논의의 장에서 멀어지고, 동시에 인류의 무의식에 더 깊이 각인된다. 이러한 터부를 상징하는 게 <랑종>의 ‘귀신’이다. 이는 단지 필자만의 의견이 아니다. 근대 문화심리학의 아버지 빌헬름 분트는 터부를 인류 최고의 불문법전이라 부른다. 여기서 불문은 不文만이 아니라 不問으로도 해석되어야 마땅한데, 그렇다면 터부는 물을 수 없기에 신성하며(Sacar) 무지의 영역이므로 부정하고 위험하다(Unrein). 실제로 터부의 어원에는 신성함, 위험함이라는 두 가지 뜻이 모두 들어있고 터부의 동력엔 기피와 숭배가 공존한다. 어원 자체로도 양가적인 터부. 따라서 선과 악으로 쉽게 규정할 수 없는 터부. 귀신은 터부고, 터부는 귀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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