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그윽한 시선이 있는데, 내가 엎어져 울고 있을 이유가 있겠는가.
미나리, 그 무한한 내리사랑이 주는 힘.
복도 끝, 외국인이 사는 집 앞. 작은 체구의 그가 문구멍에 눈을 댄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를 관찰한다. 온전치 않은 그의 다리가 못내 신경쓰인다. 순간 눈치 없이 핸드폰 소리가 울린다. 이런. 그 녀석이 나의 시선을 알아챘다.
본자는 한국지상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손흥민과 BTS의 거품을 최대한 걷어내고 그 팬덤을 살펴보기 위해 끝까지 힘쓰다, 마지못해 이들에게 손뼉 치는 부류이다. 대학 시절부터 레드팀이 되어 정(These)을 반(Anti)하는 임무가 철학의 본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테다. 그렇다고 덮어놓고 무조건 까내리는 것도 아니다. 맥심 커피는 입에 맞지 않지만, 제네시스는 훌륭한 차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나리가 꽤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 미나리는 자유를 위해 미국을 찾은 게 아닌, 미국을 통해 성공을 찾아보려는 이민 1세대들의 이야기다. 영화는 시종일관 영어보다 농사질을 잘하는 한 가족의 불안한 걸음과 우악스런 호미질을 그린다. 당시 대한민국보다 최소 열 배는 잘 사는 미국에서, 토종 풀떼기 미나리는 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이민자의 어깨마냥 위축되어 축 늘어진 뿌리가 단단한 땅을 뚫고 싹을 틔울 리 만무하다. 그들의 실패와 회한은 과보호를 낳고, 과보호는 아들 데이빗(앨런 김)을 뒈위뷧으로 만들며, 자립 능력을 상실시킨다.
하지만 데이빗은 미나리처럼 강인한 아이. 굳센 본성을 일깨운 건 그의 할머니 순자(윤여정). 기묘한 말투와 표정으로 손주를 놀려대다가도 ‘숨으면 더 무서워’라는 지혜의 금언을 뜬금없이 내뱉는 할머니. 그녀의 행태 안에 숨겨진 맹목적인 시선을 통해 데이빗은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바라본다. ‘오줌 좀 싸는 게 대수냐’ 라는 말을 시작으로, 데이빗은 금지된 장소에 발을 내디디며 뱀이 우글대는 곳에 미나리를 심기 시작한다.
지옥이 있기에 단테가 있었듯이, 할머니가 있었기에 데이빗은 각성할 수 있었다. 오줌싸개 데이빗은, 할머니의 구수한 농에 분하여 오줌을 총알로 삼아 할머니와의 전투에서 승전고를 울린다. 존재를 억압하던 오줌을, 승리의 도구로 활용한 후부터, 데이빗은 백인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 할머니는 지구 끝에서도 한국의 고집을 지켜내는 분. 데이빗의 가족이 처음으로 교회를 찾았을 때, 엄마 모니카(한예리)는 분에 넘치는 100달러를 냈고, 할머니 순자는 백 달러를 다시 꺼내어 호주머니에 둔다. 데이빗은 비굴한 건 할머니가 아니라 엄마였음을 깨닫는다.
실존에게 영감을 주는 타자가 된장 냄새 구수한 할머니로 상정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순자가 자랑할만한 것은 본향의 냄새와 조선 풀뿌리의 당당함이다. ‘어디서나 잘 자라’는 미나리가 상징하는 바는 한국의 미덕인 맹목적인 내리사랑. 그 사랑으로 무엇이든 싹 틔울 수 있다는 비합리적인 믿음. 그런 할머니는 바위 옆의 돌멩이처럼 작아도 비루하지 않다. 손주 오줌을 먹어도 재밌어서 좋다. 자학하는 광신도를 보고도 힘들겠다는 투로 스리슬쩍 넘어가는 의연함. 화투 한 장으로 낄낄댈 줄 아는 유쾌함. 그런 선대의 정신이 내 안의 가능성을 꽃피운다.
영화의 종반부, 순자의 실수로 밭과 작물이 소실된다. 노쇠한 그녀가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고, 부부의 사랑도 현실의 벽 앞에 무너지며, 좋은 값에 팔기로 한 작물마저 모조리 불탄다. 이 슬픈 장면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이유는 할머니를 향해 달려가는 데이빗을 통해 훗날의 재도약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 순자의 맹목적이고 은밀한 사랑의 시선을 깨달았을 때, 데이빗은 자신의 본류가 미나리만큼 강인하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리고 ‘그런 데이빗의 세계에 좌절과 포기는 없다.’, 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둠 속에 낯선 벨소리가 울린다. 핸드폰 화면에 비친 할머니의 얼굴이 보인다. 미처 알지 못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왠지 내가 예전의 나보다 강한 사람임을 느낀다. 할머니의 시선과 된장냄새는 어색하다. 하지만 어색함은 새로운 세계가 탄생했다는 증거. 메를로 퐁티는 타자의 등장이 감각을 바꾸고, 감각이 바뀌면 질적 공간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그렇게 상황이 뒤틀리면, 당연히 세계도 변하는 법. 아팠던 다리가 무쇠 다리가 되고말고. 그래. 우리에겐 타자가 필요하다. 오줌쯤이야 골백번도 감당하겠다는 할머니의 그윽한 시선이 있는데, 내가 엎어져 울고 있을 이유가 있겠는가.
-끝-